기억은 역사의 본질적인 요소지만 역사 서술은 승리자의 기억이 되기 쉽다. 정치권력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 관한 서술도 일상의 구조화된 권력관계에 일부러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시 온전한 기억이 되기 어렵다. 책은 싸우고, 희생됐지만 거의 잊혀진 이들에 관한 이야기다.
이승만 대통령이 사임 의사를 밝히기 하루 전인 1960년 4월 25일 오후 마산에서는 ‘죽은 학생 책임지고 리 대통령 물러가라’라는 구호가 쓰인 플래카드를 든 할머니들의 시위가 거세게 일었다. 그러나 역사는 비슷한 시간 대학교수들이 집회를 열고 시위에 가담한 것만 기억한다. 할머니 시위대의 구호가 더 명확한 정권 퇴진 요구를 내걸었음에도 그렇다.
1960년 4월 혁명이 ‘젊은 사자들의 항쟁’ 또는 뒤늦게 항쟁에 참여한 대학생과 교수단의 역할을 중심으로 기억되는 건 지식인들이 역사 서술의 재료가 되는 기록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엘리트는 기록을 많이 남기고, 당대 언론을 통해서도 주목을 많이 받는다. 그러나 여성을 비롯한 주변부의 사람들은 스스로 기록을 남기기도 어렵고, 잘 기록되지도 않아 잊혀진다.
1978년 민주노조를 만들고 지키려던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이 경찰의 방관 아래 반대파 노동자들의 똥물 세례를 받은 건 상징적이다. 책은 “인간의 품위에 살인적인 타격을 가하는 방식으로 폭력이 일어난 건 여성 노동자들이 보여준 지식에 대한 열망과 애정, 성취를 국가권력과 회사, 남성 노동자들이 인정할 수 없었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밖에 해수욕장에 놀러갔다가 삼청교육대에 끌려간 뒤 1983년 청송교도소에서 재소자의 권리를 주장하다 구타당해 사망한 박영두 씨, 1951년 겨울 경남 산청군 소정골에서 학살당한 이들의 이야기 등이 그려진다.
저자는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로 미국 우드로윌슨센터에서 방문연구원을 지냈으며 한국냉전학회 연구이사, 역사비평 등 학술지 편집위원을 지냈다. 마치 결과를 향해 단선적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이해되기 쉬운 게 역사다. 책은 역사에서 다양한 갈림길과 가능성이 교차하고 경합하는 과정과 작은 개인, 집단의 선택이 맞물리며 어떤 커다란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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