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헌책방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4일 03시 00분


코멘트
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나는 손님이 없는 한가한 시간과 긴 겨울밤을 내 특유의 장기인 목적 없는 독서로 보냈다. 그 헌책방은 교과서와 참고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류의 헌책을 다 사고팔았다. 학기 중에는 오히려 그런 일반 서적의 거래로 유지되는 편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헌책방에서 거래되는 일반 서적은 태반이 소설류였다.”

이문열의 대하소설 ‘변경’에서 작가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인철은 한때 헌책방에서 일했다. 아래 이승우의 소설 ‘생의 이면’에서 주인공 박부길은 고등학생 때부터 자취 생활을 하면서 헌책방을 출입한다. 1948년생 이문열과 1959년생 이승우는 헌책방을 기반으로 무작정 책을 읽고 목적 없는 독서를 했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이 방에서 그가 한 일은 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무작정의 책읽기. 동네에 있는 헌책방에는 별의별 책들이 다 나와 있었다. 그는 학교 가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외출을 하지 않았는데 유일한 외출이 헌책방 나들이였다.”

시인 김용택(1948년생)은 시골 초등학교 초임 교사 시절 방학 때마다 전북 전주로 가서 헌책을 구했다. 20원씩 주고 ‘월간문학’이나 ‘현대문학’ 같은 문예지도 잔뜩 샀다. 큰 가방에 헌책을 가득 담아 버스를 탄 뒤 정류장에 내려, 미리 갖다 뒀던 지게에 옮겨 싣고 집까지 걸어가곤 했다. 그 시절 어깨에 걸머진 책 지게가 ‘시인 김용택’을 탄생시킨 셈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뒤 염색한 군복 차림에 커다란 군화를 신은 서울대생 김윤식(1936년생)은, 청계천 헌책방에서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사상적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는 ‘지상의 양식’ 일본어판을 발견했다. 청년 김윤식에게 그 책은 ‘젊음의 순수와 욕망, 그리고 출발’의 선언과도 같았다. 문학평론가·서울대 명예교수 김윤식은 이 책을 지금까지 소장하며 펼쳐 보곤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헌책방 단골에서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이 된 윤성근, 사전 편찬자로 활동하며 헌책방 기록자이기도 한 최종규, ‘전작주의자의 꿈’을 펴낸 조희봉. 헌책방계의 상대적으로 젊은 고수들이 제법 있다. 전통적인 의미의 헌책방은 한 세대가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집단적 경험은 더 이상 아니며 일종의 소수 문화가 된 듯하다. 이는 무목적의 무작정 책읽기가 드물어지는 것과도 상관있는 변화가 아닐까. 지나간 시대 ‘작가와 지식인들을 키운 건 8할이 헌책방’이었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헌책방#시인 김용택#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윤성근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