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문학동네·2013년) 》
살다 보면 지나온 순간들을 곱씹으며 후회를 느낄 때가 있다. 가끔은 그 감정이 분노로 변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지겠지”라는 말로 애써 위안을 삼는다. 잊는 것이 고통을 감당하게 해줄 좋은 해결책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망각이 진행된다면 어떨까. 이 소설 속 주인공인 김병수는 26년 전 살인을 멈춘 70세 연쇄살인범이다. 그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고 무엇이든 기록하고 녹음하며 망각에 맞선다. 자신의 딸에게 접근하는 수상한 남자를 제거하겠다는 마지막 결심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최근의 일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죄책감도 못 느끼는 연쇄살인범 김병수에게 망각이야말로 무서운 형벌이었다. 결국 재판을 받게 된 그는 말한다. “사람들은 모른다. 바로 지금 내가 처벌받고 있다는 것을. (중략) 나는 망각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망각은 시간이 저지르는 공격이었다. 단순히 잊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부정당하고 엉망이 되어 버릴 때 극한의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찾아온 기자에게 김병수가 던진 말이 그 공포감을 응축하고 있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
딸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던 노인의 계획은 망각의 진행 앞에서 무너져 버리고 만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누구나 공평하게 똑같은 양의 시간을 지닌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지배하느냐는 각기 다른 문제다. 김병수는 과거를 잊고, 자신의 현재도 알아보지 못하며 시간 앞에서 완전한 패배를 인정한다.
현대인들은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그 일정을 열심히 기록하기 바쁘다. 기록을 토대로 지난날을 기억하고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가늠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이 곧 진실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지 소설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뒤틀린 기억 탓에 허상에 고통받는 건 아닌지 스스로 냉철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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