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다이어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3일 03시 00분


올해 초 다이어리에 쓴 계획들은 잘 지키고 계신지.

다이어리에 관해서라면 새해가 시작될 무렵에 글을 쓰는 게 적절했을 것이다. 이제까지 미룬 데는 사정이 있었다. 몇 해 전부터인가 다이어리는 K에게 받고 있다. 매번 똑같은 색깔과 디자인을. 그러나 친구라고 해도 일 년에 한 번도 못 만나고 지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 해에는 K가 준 다이어리 대신 여분의 수첩을 사용한다. 올해는 며칠 전에야 K를 만났다.

연초 동아일보 건강 지면의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커버스토리를 유심히 읽었다. 정신건강과 뇌 전문의들의 말에 따르면 뇌는 특성상 변화를 원하지 않으며 실천을 미루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계획을 달성하려면 작은 것부터 성공시켜서 기쁨을 느끼는 게 중요하며 그 감정이 뇌에게도 큰 자극이 된다고. 그럴 때 의지력이 필요한데 뇌와 신체에서 오는 반응으로 만들어지는 이 힘을 증가시키려면 잠을 충분히 자고 좋은 음식을 섭취하는 게 좋다고. 그 기사를 읽다가 올해는 잘 자고 잘 먹자라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나는 K가 준 다이어리를 식당 테이블에 놓고 물끄러미 보았다. 다른 때와는 달리 검은색이 아니라 낯선 보랏빛 몰스킨을. 널리 알려진 대로 몰스킨은 헤밍웨이나 반 고흐,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이 애용한 제품이다. K에게 선물받기 시작하고서 나도 써볼 수 있게 되었다. 단단하고 신뢰가 느껴지는 형태와 커버, 그 안의 스티커와 포켓, 내용물을 안전하게 묶어주는 고무 밴드, 그리고 펜의 잉크를 침착하게 흡수하는 미색의 속지. 늘 머리맡에 두지만 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자리에는 필수품처럼 언제나 챙겨 나간다. 몰스킨을 펼쳐 놓고 있으면 마음이 서서히 꿈틀거리는 게 느껴진다. 무엇이든 쓰고 기록하고 남기고 싶다는.

K는 이십 년 넘게 다닌 직장을 그만두었다.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고. 내가 틀리지 않다면 K는 문화의 출발은 문학이라고 믿는 사람에 속한다. 헤어질 무렵 K가 지나가는 투로 작품을 위해서라도 조금씩 생활에 변화를 줘보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리고 또 K는 수업 때문에 집중해서 글 쓸 시간이 부족하다는 내게 이런 말도 했다. 좋은 강의는 좋은 책을 통해서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혼자가 되어 걷다가 나는 문득 고개를 끄덕였다. K가 왜 매년 다이어리를 선물해 주는지, 이번에는 왜 검정이 아닌지 알 것도 같아서.

다이어리 앞에, 언제나 지키고 싶지만 늘 뜻대로 되지 않아 아예 써넣지 않게 된 문장을 적었다. 좋은 소설을 쓸 것.

의지력을 높이는 데는 무엇보다 “자기 확신”이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할 수 없다’가 아니라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믿는, 우리가 다 아는 바로 그 마음. 오월이지만 아직 너무 늦지 않았겠지.
 
조경란 소설가
#다이어리#자기 확신#의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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