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서울 강서구 화곡동 에밀레하우스에서 개관기념전 ‘벽사의 미술’이 열렸다. 전시 작품은 기와 100여 점과 까치호랑이 그림을 포함한 조선 민화 12점. 국내 첫 민화 전시였다. 민화라는 이름조차 낯선 시절, 그 전시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명품이 아니라 이름 없는 백성들의 그림을 전시하다니.
그로부터 약 50년. 요즘 민화의 인기가 높다. 민화 가운데 까치호랑이를 특히 더 좋아한다. 여기저기 민화 전시가 열리고 민화를 배우는 사람도 많다. 외국인들의 관심도 부쩍 커졌다.
1968년 첫 민화전이 열릴 무렵, 민화에 대한 관심은 척박했다. 20세기 들어 민화에 대한 인식을 촉발시킨 인물은 일본의 민예이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였다. 그는 1959년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라는 글을 발표했다. 민화라는 용어도 그가 처음 사용했다. 우리의 민화를 일본에서 먼저 주목한 것이다.
야나기에게 자극받아 민화에 관심을 갖고 수집을 시작한 사람이 여럿 생겼다. 그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사람은 단연 조자용(1926∼2000)이었다. 그는 원래 토목건축 전공자였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조자용은 기와 도깨비 등의 전통문화에 빠져들었고, 1965년 서울 인사동에서 우연히 까치호랑이 그림을 만났다. 그에게 까치호랑이는 한국 전통미술의 새로운 세계였다. 조자용은 민화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그래서 에밀레하우스(훗날의 에밀레 박물관)를 세우고 거기서 국내 최초로 민화전을 개최한 것이다.
조자용은 까치호랑이 그림에 주목했다. 권력자와 민초(民草)의 관계를 반전시킴으로써 풍자와 해학을 멋지게 구현한 작품으로 보았다. 조자용은 자신이 소장했던 까치호랑이 민화 한 점을 ‘피카소호랑이’라 불렀다. 피카소 화풍을 연상시키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두고 “보면 볼수록 신비스러운 쾌작(快作)이며 화면 전체에 초현대적 추상의 창의력이 흐른다”고 평했다.
그의 노력에 힘입어 1970년대 민화 전시는 서울 변두리 화곡동에서 도심으로 확산되었다. 1980년대엔 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좀 더 친숙한 존재로 자리 잡았다. 급기야 피카소호랑이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의 모티프가 되었다. 호돌이로 다시 태어난 까치호랑이. 호돌이는 여전히 매력적이다. 까치호랑이는 우리 시대 전통의 상징이 되었다. 조자용 덕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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