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학생운동의 종말을 알린 사건이 ‘연합적군사건’(1971∼1972년)이다. 공산혁명을 꿈꾸던 20대 젊은이들은 산중에 도피하던 2개월 동안 서로를 비판하며 린치를 가해 무려 12명을 숨지게 했다. 사망자 중에는 8개월 된 임신부도 있었다.
이들은 ‘총괄’이라는 명목으로 자기비판을 하게 한 뒤, 그걸 이유로 다시 폭행을 이어갔다. 동생에게 형을 때리게 했고, 여성에게 스스로를 때리게 한 뒤 거울을 주고 부은 얼굴을 보게 했다. 열정과 순수함으로 ‘평등한 세계’를 외치던 젊은이들은 동지에게 왜 이렇게 가혹했던 것일까.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 기리노 나쓰오의 신작 ‘밤의 계곡을 가다’는 이 사건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점에서 그린 후일담 소설이다.
주인공 니시다 게이코는 당시 폭행을 하진 않았지만 시신 은폐 등에 가담한 죄로 5년간 감옥에 있다 출소한다. 이후 학원을 운영하며 조용히 생활했고 지금은 은퇴해 도서관과 저렴한 운동시설을 오가는 일상을 보낸다. 그런 그에게 사건의 주범 나가타 히로코가 2011년 감옥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당시 사건은 사회적 파장이 컸던 만큼 관련자들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니시다의 아버지는 직장을 떠났고 술을 마시다 세상을 등졌다. 여동생은 남편과 이혼했다. 친지들은 의절을 통보했다. 모든 책임을 진 니시다는 아무런 희망을 갖지 않은 채 그저 조용히 40여 년의 세월을 견뎌 왔다.
하지만 과거의 망령은 끈질기게 그를 따라다닌다. 미군 부대에 테러를 저지른 전력 때문에 자식처럼 생각하는 조카가 사이판에서 결혼식을 할 때도 못 간다. 당시 사건을 취재하는 작가로부터 연락이 오고, 숨겨왔던 신상이 이미 노출됐다는 걸 알게 된다. 조직의 명령으로 위장 결혼을 했던 전남편은 노숙인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며 조카에게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했던 그가 덮어놨던 과거의 진실이 하나씩 드러난다. 벌레조차 무서워하는 그가 나약함을 감추고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매도하던 지도부에 동조했다는 것, 그로 인한 죄책감에 평생 시달리며 스스로 고독을 택했다는 것.
작가는 사건 자체에 대해선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의 어두운 내면을 묘사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가진 그는 주인공의 사소한 일상과 그 사이로 언뜻 내비치는 과거의 참혹한 사건을 대비시키며 독자의 마음을 서늘하게 한다.
불안과 열등감, 의심에 시달리던 젊은이들은 ‘로봇 같은 혁명전사가 돼야 한다’며 서로를 압박했고 필사적으로 강한 척을 했다. ‘기절하고 깨어나면 진정한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며 때렸고, 죽으면 ‘패배사’라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주인공은 비겁하고 나약했던 자신에게 평생 짊어져야 할 고통을 스스로 부여했다. 소설 중반까지 끊임없이 자신을 정당화하는 주인공에게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 독자들은 마지막 페이지에서 선연한 진실을 알고 전율하게 된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독자들이 ‘그 시대 그 장소에 있었다면’이란 상상을 하며 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대의를 내세우며 인간성을 개조하려는 위험한 시도가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낳는지 알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사건을 더 알고 싶다면 와카마쓰 고지 감독의 영화 ‘실록 연합적군’(2007년)을 보는 것도 좋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