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또박또박 말해도 안 들린다니, 일부러라도 목소리를 키워야 합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민경·봄알람·2016년)
지난해 5월 17일 오전 1시 20분경 20대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졌다는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이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 곳은 서울 서초구의 한 상가 남녀 공용 화장실이었다. 범인은 다행히도 사건 발생 9시간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문제는 그 남성의 진술이었다.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는 용의자의 말은 많은 이들을 분노에 떨게 했다.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는 한동안 ‘여성 혐오’에 저항하는 노란색 ‘포스트잇’으로 뒤덮였다. 일상에서 종종 겪는 무서운 상황도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으로 여기며 숨죽여 왔던 여성들이 비로소 목소리를 낸 시발점도 됐다.
하지만 다른 반응도 있었다. 일각에선 “죽음은 안타깝지만 여성 혐오 범죄로 보는 건 과도한 해석”이라거나 “요즘 시대에 성차별이 어디 있느냐”며 여성들의 목소리를 부담스럽게 받아들였다. 경찰도 범인이 조현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를 들며 “여성 혐오 범죄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이 같은 반응을 갑갑하게 여긴 이민경 씨가 쓴 책이다. ‘강남 화장실 살인사건’ 이후 두려움과 차별, 혐오에 관해 입을 열기 시작한 여성들에게 쏟아진 남성들의 반발에 대응하기 위한 워크북인 셈이다.
이 씨는 차별은 언제나 있었다고 얘기한다. 학급 회장을 뽑을 때도 남자 아이가 회장을 하고 여자 아이는 부회장을 하던 관행, 짧은 옷차림이 성범죄를 불러오니 옷차림에 신경 쓰라는 주장, 여자는 무조건 ‘얼굴’이라는 술자리 농담은 모두 여성에 대한 차별이 깊게 배어 있는 것들이다.
물론 누군가는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이 씨는 “경제 위기로 백인 남성이 예전만한 영광을 못 누린다 해도 기득권은 있다”고 일갈한다. 저자는 되도록 좋게 해결하자는 식의 생각도 극복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귀만 막는다면 평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한쪽 세계만의 관점일 뿐이라는 것이다. 상대방은 태어날 때부터 불편함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결국은 그 불편함을 인식하는 게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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