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달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7일 03시 00분


소설 수업을 수료한 제자에게 선물을 받았다. 얼마 전부터 아버지가 닭들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내가 달걀을 좋아하는 게 생각나서 얻어왔다고 말했다. 닭들을 마당에 방사해 놓고 키워 얻은 알들이니 얼마나 신선할까. 박스에는 열여덟 개의 갈색 달걀이 들어 있었다. 이런 좋은 선물을 덥석 받아도 되나, 잠시 고민했다.

‘와인즈버그, 오하이오’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작가 셔우드 앤더슨의 단편 중에 ‘달걀’은 개인적으로 ‘세계단편명작 10선’을 꼽는다면 빼놓을 수 없는 소설이다. 큰 욕심 없이 살아가던 아버지가 가족에 대한 책임을 느끼곤 양계장 사업을 시작하지만 실패한다. 그 후 작은 음식점을 차린 아버지는 손님들에게 유흥거리를 제공해줘야 한다는 일념으로 달걀로 마술을 부리려는 시도를 한다. 어느 날 한 젊은이를 상대로 달걀을 세워 보이는 것도, 좁은 유리병으로 달걀을 집어넣는 마술도 다 실패한 아버지가 마침내 어머니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어린 소년처럼” 우는 모습은 실제로 본 것같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아버지의 빈 정수리를 어머니가 쓰다듬는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또 얼마나 쓸쓸한지.

최근에 어떤 책에서 마음을 가라앉힌다는 뜻의 ‘정심(定心)’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보게 되었다.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 평소에 책을 읽거나 걷는 일 말고도 매일 늦은 저녁이면 한 알씩 삶아서 허기를 달래는 달걀을 나는 물속에 집어넣기 전에 손으로 만지작거리곤 한다. 타원형의 둥글면서 깨지기 쉬운 그 살아 있는 다공질의 달걀을 가만히 쥐고 있는 사이, 어쩌면 나에게는 그것이 정심을 행하는 또 다른 방법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제자에게 받은 달걀을 처음 삶아 먹던 저녁에도 그랬다. 더불어 그 제자의 아버지 생각을 문득 했는지도 모르겠다.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지지난해인가, 일 년 가까이나 가족들도 모르게 잠적을 해야 했다던. 그래서 제자가 휴학할 수밖에 없었고 마음고생도 컸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좋은 책을 알려주거나 이따금 밥을 사주는 일밖에 없었고. 그 제자의 아버지가 이제 작지만 서울 근교에서 마당에 닭들을 키우며 살고, 표정이 다시 환해진 제자는 가끔 거기 가서 아버지를 만나고 달걀을 얻어오곤 한다니.

달걀에 관한 속담 중에 “달걀도 굴러가다 서는 모가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좋게만 대하는 사람도 성낼 때가 있다’는 뜻 외에도 ‘어떤 일이든지 끝날 때가 있다’라는 의미로도 읽는다. 이 작지만 특별한 달걀이, 나에게는 제자의 가정에 있던 그 어려움은 지나갔다고 말해주는 듯 보인다. 셔우드 앤더슨의 ‘달걀’의 발표 당시 원제목은 ‘달걀의 승리’였다. 사물도 아닌 달걀 한 알을 손으로 감싸고 있다가 이런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조경란 소설가
#달걀#셔우드 앤더슨#와인즈버그 오하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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