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 권유 소주 석 잔에 정신을 잃다시피 했으니 선천적 알코올 분해효소 결핍증이 틀림없다. 그런 내게 ‘해장음식’이란 것이 있다. ‘포(pho)’라고 부르는 베트남 쌀국수다.
몇 년 전 프랑스 부르고뉴의 도시 2, 3군데를 거쳐 리옹에 며칠 묵고 파리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여행을 다녀왔다. 일주일 동안 아침에는 크루아상과 커피, 점심에는 비스트로 요리, 저녁에는 프렌치 정찬으로 위장에 온통 버터 칠을 해놨더니 마지막 날에 속이 느글거려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고속열차를 타고 파리로 돌아오자마자 숙소에 짐을 던져놓고 곧바로 찾아간 곳이 바로 베트남 국수집이었다.
뼈와 고기를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민트와 고수, 동남아 바질 등 향이 강한 허브를 찢어 넣고 라임 조각을 꾹 짜서 뿌린 후 칠리소스를 쳤다. 매끈한 국수를 한입 가득 물고 국물을 쭉 들이켜니 ‘아’ 하는 안도의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술 맛은 몰라도 해장의 느낌이란 것이 이런 걸까 싶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베트남인들 덕에 파리의 포는 베트남 현지의 맛을 능가한다는 정평이 나 있다. 그들에게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타향살이의 고단함이 녹아 있는 ‘솔 푸드’일 터이니 그 맛이 깊고 진할 수밖에….
결혼하고 미국 뉴욕에서 10년간 살면서 가장 자주 찾았던 식당도 맨해튼 차이나타운의 베트남식당이다. 친척이나 지인이 뉴욕을 방문할 때면 모조리 데려가 베트남 요리와 포를 먹여 보냈다. 한참 요리에 대한 탐구심에 불타오르던 어느 날, 요리책을 사서 레시피대로 포를 만들기도 했다.
살코기가 적당히 붙은 소의 잡뼈와 꼬리뼈를 사다가 핏물을 빼고 오븐에 넣고 구워 적당히 그을린 후(이것이 포인트다. 뼈를 구워서 국물을 내야 구수하고 진한 육수가 나온다) 큼지막한 솥에 옮겨 넣고 물을 가득 부었다. 누린내를 잡아 줄 팔각과 정향, 통후추를 넣고 여러 시간을 끓인 후 뼈를 건져내고 뼈에 붙은 살을 발라냈다. 살코기는 고명용으로 따로 보관하고 뼈를 다시 육수에 넣고 몇 시간을 더 끓인 후 밤새 식혔다. 다음 날 아침 기름을 걷어내고 육수를 다시 데우자 마치 한약을 달이는 듯 달짝지근하면서도 구수하고, 향신료의 잔향이 은은한 육수가 완성됐다.
그때 그 육수의 진하면서 개운한 맛을 아직도 기억한다. 자그마치 1박 2일에 걸친 보람찬 도전이었지만 그 후로 다시는 만들지 않았다. 해장음식은 아무리 맛나도 하루 반나절이 걸려 만들 일은 아니다. 돈 주고 사먹는 게 정답이다. 포는 속풀이로 그만이지만 날이 좋아도 나빠도, 비가 와도 맑아도, 추워도 더워도 어울리는 오묘한 음식이다.
홍지윤 쿠킹클래스 쉬포나드 운영자 chiffonade@naver.com
○ 포다 쌀국수 인천 부평구 부평대로40번길 1, 070-7750-6668, 쌀국수 8000원
○ 안 서울 마포구 동교로 262-13, 070-4205-6266, 쌀국수 1만2000원
○ 미분당 서울 서대문구 연세로5다길 35, 02-3141-0807, 차돌양지 쌀국수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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