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진건의 ‘무영탑’에 나오는 아사달과 아사녀의 사랑이야기 덕분에 그간의 경주는 내게 신비로운 도시였다. 불국사 석가탑과 다보탑은 ‘부여의 석공’ 아사달의 손길이 닿았을까 설렜고, 첨성대나 동궁과 월지(안압지)를 걸어서 만나볼 수 있는 것은 경주 생활만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었다. 누군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어느새인가 내게 신비로움을 선사하던 많은 역사 유적은 생활공간으로 바뀌어 버리고, 여행객처럼 보던 내 시선은 주민들을 좇아 미시적인 요소들에 가 닿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집은 경주시청 근처 동천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가끔씩 동궁과 월지까지 약 3km가 되는 구간을 걷는다. 대릉원의 묘를 지나 한참을 걸으면, 7∼8월이 되면 연꽃이 만발하는 안압지 연꽃단지를 만난다. 대릉원을 걸을 때는 듣고 있던 음악을 끄고 경건한 마음으로 걷는다.
사람들이 안압지라고 알고 있는 동궁과 월지는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해, 매년 많은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라 문무왕 시절 축조된 별궁 안에 마련된 연못으로, 고대 당나라와 백제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궁원지다. 기러기(안)와 오리(압)가 계속 날아온다고 해서 조선시대 이후 ‘기러기와 오리의 연못’이라는 뜻의 안압지라고 불렸으나, 신라시대 때 월지라고 불렸던 기록이 복원되고 월지라 적힌 토기의 파편이 발견되면서부터 동궁과 월지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라의 경사를 축복하던 연회 장소로 사용됐던 만큼이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연못 가장자리의 굴곡은 못 전체가 시야에 들어오도록 한다. 입장료는 2000원이지만 경주 시민은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경주 시민이 되고 난 후 한 나라의 연회 장소를 부담 없이 드나들며 건강도 챙기고 있으니 일상적인 조깅 코스로는 벅차다 할 만큼 호사를 누리는 셈이다.
경주시 장항리에 위치하는 한국수력원자력 본사는 형제산(530.5m), 조항산(596.2m), 백두산(449.1m), 토함산(745.7m) 등을 사방에 두었다. 처음 한수원 본사를 방문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우스갯소리로 ‘한수사(寺)’라 불리곤 한다는데, 그 말이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점심에 회사 근처 식당을 찾아갈 때는 인도가 없는 도로를 걸어가야 하는데 트럭이라도 지나가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래도 다리를 간질이는 야생 들풀을 옆에 두고, 주인 모를 벚나무의 버찌들을 따먹으며 앞니 몇 개를 물들이다 보면 내가 사는 이곳의 민낯을 잠시나마 엿보게 된다.
경주 생활 속에서 작다면 작지만 나를 새롭게 만드는 미시적 요소들은 회를 거듭할수록 경주를 알아가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만족하는 법을 매일 배워간다.
―손민지
※필자(34)는 경기 부천에서 생활하다 지난해 경북 경주로 옮겨 한국수력원자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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