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각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2일 03시 00분


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책이나 논문의 본문 아래쪽에 달아놓는 설명, 각주의 기원은 불분명하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의 활판인쇄술 발명 이후 인쇄본이 확산되고 인문주의자들이 고전을 편찬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각주는 아니어도 책 페이지 여백에 넣는 난외(欄外) 주석이 발달하였다. 1568년 영국 런던의 인쇄업자 리처드 저그가 ‘비숍 성서’를 인쇄하면서 각주를 고안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난외 주석에 가깝다.

17세기 프랑스 사상가 피에르 벨의 ‘역사비평사전’(1697년)에서 처음 각주가 사용됐다는 설이 있지만, 비슷한 시기에 다른 저자들도 사용했다. 역사학자 앤서니 그래프턴의 ‘각주의 역사’에 따르면, 오늘날과 같은 각주는 17세기 말에 탄생한 뒤 여러 세대에 걸쳐 많은 학자들이 발전시켰다. 특히 19세기 독일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각주의 학문적 역할과 위상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전통 동아시아에서는 유교 경서와 불경 등에 해석과 설명을 붙이는 주소(注疏)가 학문 활동의 핵심이었다. 예컨대 유교에는 주요 텍스트 13종에 주석을 붙인 ‘십삼경주소’가 있으며 주자의 ‘사서집주’는 오랜 세월 표준 해석의 권위를 누렸다. 이러한 주소는 그 자체가 중요한 연구 성과여서 오늘날의 각주보다 위상이 훨씬 더 높기 때문에, 각주의 기원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리나라에서 각주의 오래된 용례로는 일연의 ‘삼국유사’(1281년경) 명랑신인(明朗神印)조가 있다. “돌백사 주첩의 주각(注脚)을 상고해보니 이렇게 기록되었다.” 일연이 주첩, 즉 공문서에 달린 주석을 참고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5년(1415년) 8월 13일, 법령집 정리에 관한 태종의 지시에도 나온다. “‘원전’을 고쳐 ‘속전’에 실은 것을 모두 다 삭제하고, 그중에 부득이한 일은 ‘원육전’ 각 조목 아래에 그 주석을 쓰라(書其注脚).”

각주가 많이 달린 소설도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김숨의 장편소설 ‘한 명’은 258쪽 분량에 각주가 316개다. 증언집, 취재록,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자료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소설법’을 비롯한 박상륭의 소설에도 적지 않은 각주가 달려 있다. 각주가 많으면 독서의 흐름이 끊어지고 번쇄해질 수 있으나, 각주 읽는 재미도 있다. 본문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본문보다 자유롭게 각주에서 펼치는 책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럴 때 각주는 책 안의 책이 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각주#사서집주#각주의 기원#사상가 피에르 벨#역사비평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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