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 사물 이야기]티셔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31일 03시 00분


동생 생일 저녁을 집에서 먹기로 해서 주말에 모였다. 기온이 높아져서인지 가족들 모두 반팔 티셔츠를 입은 게 눈에 띄었다. 아버지는 몇 년 전 내가 하버드대에 갔을 때 산 회색 티셔츠를, 막내 제부는 휴가지에서 사온 흰색 티셔츠를, 조카들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에 ‘unplugged(플러그를 뽑다)’라는 영문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동생과 어머니는 헐렁한 라운드 티셔츠, 나는 까만 면 티셔츠를. 아버지 옷 목 부분에 꿰맨 자국이 보여 물어보니 다른 데는 멀쩡한데 거기만 해져서 세탁소에 수선을 맡겼다고 했다.

가족에게는 기념품이나 선물로 티셔츠만 한 게 없는 것 같다. 뉴욕 베네치아 버클리 파리 같은 도시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기 전이면 매번 티셔츠를 샀다. 처음에는 아버지 것만, 동생들이 결혼했을 때는 제부들과 차례차례 태어났던 조카들 네 명의 티셔츠를. 주로 그 도시의 상징물이나 대학 로고가 프린트된 종류였는데, 조카들은 지금도 티셔츠를 서로 물려 입곤 한다. 티셔츠란 그런 옷이 아닐까. 어디서나 살 수 있으며 낡고 늘어질 때까지 입어도 되고 다른 옷에 비해 가격도 저렴한 편이고 겉옷으로도, 카디건이나 스웨터 안에 입을 수도 있고. 대개 한 장쯤 갖고 있는 데는 이 같은 이유가 있을지 모른다.

야코프 하인의 소설 ‘나의 첫 번째 티셔츠’에 이런 단락이 나온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 내 첫 번째 티셔츠는 노란색이었다. 노란색 티셔츠, 처음부터 너무 많이 빨아서 퇴색된 것처럼 보이고 형광빛이 났으나 그것은 나중엔 사라져버렸다.” 티셔츠에 관한 기억을 통해 작가는 동독에서 보낸 유년의 경험을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린다. “나는 어디서 출발했을까?” 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함께. 문득 나의 첫 번째 티셔츠는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해지지 않나.

티셔츠를 입은 가족들, 특히 수선한 옷을 입고 있는 아버지를 밥상 앞에서 보고 있자니 올가을에 가게 될 도시에서도 티셔츠 몇 장 사와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잠깐만! 어떤 물건이 만들어지고 사용되다 버려지기까지를 보여준 책 ‘물건 이야기’의 내용이 떠오른다. 티셔츠 한 장이 생산되기 위해 필요한 물의 양, 노동의 양, 그리고 인권 문제까지. “환경의 정의를 다시 썼다”는 찬사를 받은 이 책의 저자가 티셔츠에 관해 한 말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새 옷을 사기 전에 지금 입고 있는 티셔츠를 소중히, 입을 수 있을 때까지 입으라고.

사람들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새겨진 그림과 문장들을 유심히 보게 된다. 에코백처럼 거기에도 어떤 개인적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아서. 다시 보니 아버지의 티셔츠는 그 안에 숨겨진 ‘진정한 비용’에 대해 떠올리는 내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아직 괜찮다고.
 
조경란 소설가
#야코프 하인#소설 나의 첫 번째 티셔츠#진정한 비용#물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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