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언의 마음의 지도]공격성의 민얼굴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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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인간을 성욕과 공격성을 빼고는 논할 수 없다는 프로이트의 주장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딱 그렇습니다. 한편에서는 성(性)이 넘쳐나고, 다른 편에서는 전쟁, 테러, 차별이 계속됩니다.

천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공격성은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나타납니다. 요새 부쩍 사회적으로 논의되는 보복운전이나 ‘묻지 마 폭행’이 그렇습니다. 과격하지 않은 공격 행위도 있는데, 눈빛, 표정, 태도, 걸음걸이가 효과적인 것들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멀리하거나 쫓아낼 수 있습니다.

상하관계에서는 분위기만으로도 공격이 가능합니다. 아랫사람을 갑자기 불러놓고 침묵을 지키면 효과가 뚜렷합니다. 아니면 같은 내용의 이야기도 말투로 함량이 조절됩니다. 범위를 넓히면 기득권층은 사회가 정한 관습과 가치관을 활용해서, 국가권력은 법 제도나 행정 조치를 통해 누구든지 공격할 수 있습니다. 공격의 주체가 실제로는 개인이어도 사회나 국가의 뒤로 숨어버리면 공격을 당하는 사람은 대항을 제대로 못하고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집니다.

창작의 세계에서도 공격성 표현은 다양합니다. 영화, 연극, 문학, 회화 속의 것들은 피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안방극장을 점령하고 있는, 공격성으로 얼룩진 이런저런 TV드라마의 막장 스토리를 피하려면 가족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껏 한다는 일이 귀를 가리고, 소리 지르지 않고 할 수 있는 연기는 없는지를 원망하는 겁니다. 불평하면서도 은근히 중독성이 있어서 가끔 옆에서 같이 보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논의를 해 보았자 국민 정신건강에 유해하다는 입장과 이미 피폐해진 우리 사회를 반영했다는 주장이 평행선을 그을 겁니다. 무력감을 느낍니다.

무력감 제2편의 배경은 식당입니다. 식당은 일정 시간대에 사람들이 몰리는 장소입니다. 이곳에서 당하는 공격은 일부 손님들의 ‘큰 목소리’입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오랫동안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 동물들이 배설물로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는 행위가 사람에서는 언어의 탈을 쓴 ‘문명화된 방법’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식당 안 이 자리, 저 자리의 큰 목소리들은 시간이 흐르면 경쟁을 시작합니다. 통제가 불가능하니 무력감에 빠집니다. 그들의 식탁에 음식이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습니다. 시끄러운 정도를 휴대전화 앱으로 측정해 보기도 하는데, 잠실 종합운동장역 앞에 펼쳐진 넓고 넓은 길의 소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번잡한 식당을 되도록 피합니다. 가더라도 일찍 갑니다. 식사도 서둘러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끄러운 대화가 연이어지면 혈압은 올라가고 공격적 충동은 식탁 위의 찌개처럼 끓기 시작합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제 초자아가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잘 붙들어주고 있습니다.

이걸 꼭 아셔야 합니다. 주먹을 휘둘러야 꼭 공격이고 폭력이 아닙니다. 이탈리아에 가서 성악공부를 하던 한국 학생들에게 현지 선생님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 학생들은 너무 폭력적으로 노래를 부른다는, 제대로 된 노래는 절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포를 쏘는 소리같이 노래를 부르면 ‘와’ 하고 감탄하고 손바닥 아프게 박수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뒷사람의 ‘브라보’ 연발에 귀청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악을 아끼는, 연주자의 성별에 따라 ‘브라바’와 ‘브라보’를 구분해 쓰시는, 많이 배우신 분들도 얼마든지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소리도 지나치면 공격입니다. 안 가도 되는 음악회와 달리 매일 타는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큰소리는 기본이고 내용까지 다 들어야 하는 휴대전화 통화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좀 배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해 자주 써먹는 방법은 ‘시시콜콜 따지는’ 겁니다. 그중에서도 엉터리 논리를 써서 목소리 높이는 행위는 압권입니다. 말이나 글에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스스로 펼쳐내는 ‘논리의 그물’로 다른 사람을 포획하는 기쁨을 즐깁니다. 토론회나 청문회를 보고 들으시면 금방 이해하실 겁니다.

공격을 당한 피해자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는다고 반격을 접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수동적 공격성’이 때로는 승부를 뒤집습니다. 지식의 격차가 있는 논쟁에서도 부족한 사람이 넘치는 사람에게 “제가 뭘 아나요!”라며 회심의 한 방을 날릴 수 있습니다.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을 어기는 일의 실체도 사과의 말과 달리 공격일 수 있습니다. 제가 이 원고의 마감 시간을 어겨 담당하신 분들의 마음을 힘들게 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지만 그런 일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할 공격성이 방향을 돌려 자신에게 돌아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답은 우울증입니다. 그렇게 되면 스스로 초라하고 슬프고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울증은 뇌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이 깨져서 생긴 병이니 항우울제만 쓰면 된다고요? 심한 우울증의 치료에 약이 중요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우울증 재발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습니다. 환자의 마음 안에서 부단히 스스로를 공격하는 공격심을 처리해야 합니다. 재산을 잃어버리고 우울증에 빠졌는데 돈을 다시 벌어야 하지 돈이 드는 정신분석이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고요? 현실의 이유가 있어도 스스로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벗어나야 돈도 다시 벌 수 있지 않나요? 그러니 설령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를 못살게 굴어도 나는 나를 아껴야 합니다.

공격성이 100% 나쁜 것은 아닙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공격성이 꼭 필요합니다. 유전자 조작으로 인간의 공격성을 전부 없애 새로운 인류를 만들어낸다면 그들의 생존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릴 겁니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에게도 고개 숙이게 될 겁니다.

공격성은 인간이 인생 목표를 달성하게 하는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책상머리에 붙어 있을 ‘○○시험 100일 정복’ 같은 글귀는 수험생에게 인생 험로를 개척할 용기를 줍니다. 사업가에게는 ‘공격적인 투자’ 같은 표현이 기업을 움직이는 힘을 줍니다.
 
정도언 정신분석학자 서울대 명예교수
#묻지 마 폭행#공격성 표현#무력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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