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폐막한 제70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 취재진의 마음을 울린 건 배우 변희봉(75)의 한마디였다. 세계 취재진이 모인 영화 ‘옥자’의 공식 기자회견에서 맨 끝자리에 앉아 질문 하나 받지 못했지만, 그는 연신 여유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따로 열린 간담회에서 소감을 묻자 그는 비로소 “행복하다”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노배우의 연기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분위기가 순간 숙연해지기까지 했다.
12일의 영화제 기간 동안 젊고 화려한 외모의 여배우들이 레드카펫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여배우는 중년의 니콜 키드먼(50)이었다. 4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유난한 열정을 뽐낸 그는 여우주연상 수상 가능성을 묻자 “모두가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썼으니 ‘지는 배우도, 지는 영화도 없다’”고 했다. 그뿐인가. 86세의 나이에도 “계속 연기할 것”이라며 의욕적인 모습을 보인 배우 겸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부터 최고령이지만 또 다큐멘터리 영화를 들고 영화제를 찾은 아녜스 바르다 감독(89)까지….
“이런 게 특히 인기가 많던데요.” 영화제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유명하다는 프랑스 약국에 들르자, 점원이 이렇게 말하면서 제품 상자를 한가득 꺼내 놨다. 눈과 입가에 바르는 크림, 목주름을 예방하기 위해 바르는 오일…. 이른바 안티 에이징 제품들을 보며 축제가 끝났음을, 나이 듦이란 역시 ‘안티’의 대상임을 새삼 실감했다. 수완 좋은 직원이 물건을 팔려고 없는 얘기를 지어낸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노화 방지 제품이 “한국인들에게 유별나게 인기가 좋더라”고 했다.
사실 ‘나이듦’은 기대감보단 공포심,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느낌부터 준다. 얼마 전 일본 도쿄경제대의 오쿠야마 쇼지 교수가 일본 3개 대학의 학생 91명을 대상으로 노화에 대한 인식을 조사했더니 긍정적인 편견(평균 0.77점)보다는 부정적인 편견(평균 2.88점)이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오쿠야마 교수는 이를 통해 “노화를 거부하고 나이듦을 추하게 여기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고 지적했다. 비단 일본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한국처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노인 빈곤율 1위를 달리는 곳에선 노년이 주는 즐거움, 안정감보다는 그에 수반되는 경제적 빈곤, 신체의 어려움, 고독 같은 부정적인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게 현실이다.
모두가 노화와 사회의 고령화에 대해 얘기하는 요즘이지만, 정작 노년의 삶 자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부족하다. TV엔 ‘현명하게 노후를 대비하라’는 연금 광고가 넘친다. 노년을 살아가려면 한 달에 얼마가 필요한지, 지금 통장에 얼마가 있는지 당장 계산기를 두드려 보라고 한다. 고령자가 물건을 들 때 도와주는 근력 지원 로봇 슈트, 노후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신경 줄기세포 치료 기술 등 ‘스마트 에이징’ 관련 기술이 미래에 유망해질 것이란 전망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현명하고 품격 있게 늙을 것인가에 대한 조언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막지 마세요. 촬영해 드릴 테니 카메라 이리 주세요.” 니콜 키드먼은 공식 행사가 끝나고 퇴장 길에 “사진을 찍어 달라”는 사람들의 요청이 빗발치자 먼저 웃으며 다가왔다. 검은 정장 차림의 경호원들이 사람들을 밀어냈지만 “그냥 두라”며 오히려 휴대전화를 받아들고 허리를 숙여 직접 ‘셀카’를 찍어주는 넉넉한 모습을 보였다. 그 순간만큼은 옆에 있던 다른 젊고 예쁜 여배우들보다도 그에게서 진정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짧은 순간의 모습이 그의 진면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 역시 품격 있게 나이 들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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