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매장만 둘러볼 요량으로 오랜만에 동네 백화점에 갔다. 중국식당에서 어머니 칠순잔치를 하고 이차 모임은 집에서 하기로 했으니 마른안주라도 준비해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다른 층은 가지 말아야지, 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주방용품을 파는 매장으로 올라가고 말았다. 체코에서 생산된 한 식기 브랜드에서 입점 기념 할인 행사를 하고 있었다. 다양한 ‘양파꽃 패턴’의 코발트블루 접시들 앞에서 한참 서성거리다가 파스타나 볶음밥을 담기에 적당한 다목적용 접시 한 장을 사버렸다. 내일 손님들도 오니까라고 핑계를 대면서.
혹시 계몽사에서 출간된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을 기억하시는지. 그 50권 중 ‘일본 동화’ 편에 수록된 ‘되돌이 산’이라는 동화를 나는 자주 떠올리고는 한다. 어떤 가난한 마을에 손님을 맞거나 잔치 때 필요한 그릇이나 접시를 빌려주는 신비한 산이 있었다. 빌려 가면 반드시 그 산 입구에 그릇을 가져다 놓아야 한다. 어느 날 욕심 많은 동네 사람이 아름다운 그릇을 돌려주지 않게 되면서 다른 사람들이 곤란에 처하고 되돌이 산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데 대해 일종의 벌을 내린다는 이야기.
내 기억에 의하면 이런 줄거리인데 어쩌면 사실과 다를 수도 있겠다. 그 전집을 먼 친척에게 물려주곤 후회한 지 이십 년도 넘었으니까. 어쨌거나 약속을 지키고 신뢰 관계를 깨뜨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점은 그 유년 시절 ‘되돌이 산’이라는 동화로 배웠던 것 같은 느낌이다. 지금의 눈으로 다시 읽는다면 그저 피식 웃고 말지도 모르지만.
주방 서랍장을 열어보니 접시들이 꽤 있다. 어머니 말에 따르면 삼십칠팔 년 전엔가 금성전자에서 잠깐 수출을 목적으로 만들었다가 직원들에게 저렴하게 팔 때 구입했다는 연한 갈색의 크고 튼튼한 접시들, 네 시간을 보내야 했던 헬싱키 반타 공항에서 조카들 주려고 산 무민 캐릭터가 그려진 핀란드 접시들, 상하이 작가협회의 초청을 받아 간 숙소에 쓸 만한 식기가 없어서 슈퍼마켓으로 달려가 산 흰 접시. 나는 코발트블루 새 접시에 붉은 토마토와 모차렐라 치즈를 썰어서 얌전히 담고 오목한 상하이 접시에는 나초칩과 살사소스를 담아 어머니 칠순에 모인 친척들에게 내놓았다.
자칫 손에서 미끄러져버리기 쉬운 접시같이 신뢰라는 건 늘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아는 나이가 되었다. 물론 이 세상 어디에도 ‘되돌이 산’은 없다는 사실 또한. 그래서 밥과 면을 담을 수도 있고 나물 한 가지만 담아도, 무심히 사과를 올려놓아도 보기 좋은 그런 접시를 가끔은 충동구매하게 되는 것인지도.
사족이지만 이참에 계몽사 동화전집을 구해 볼까 하고 자주 이용하는 헌책방에서 찾아보다 가격에 놀라고 말았다. 갖고 싶어도 너무 비싼 사물은 일단 단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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