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역사에서 주목할 사실은 20세기에 이룬 경이적 발전의 토대가 된 수많은 과학적 발견이다. 그중 잊지 말아야 할 한 사람이 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1831∼1879)이다. 그는 전기와 자기현상에 대해 통일적 기초를 제공한 물리학자 겸 수학자. 그가 없었다면 20세기 물리학의 금자탑이라 할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나올 수 없어서다. 아인슈타인과 뉴턴에 이어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물리학자에 선정(2000년 ‘Physics World Magazine’ 조사)된 건 그 덕분이다.
그의 맥스웰방정식(전자기 이론을 정리한 수식)은 큰 영감을 주었다. 조지프 존 톰슨에겐 원자와 전자(1897년), 닐스 보어에겐 양자도약(1913년), 제임스 채드윅에겐 중성자 발견(1932년)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보어와 채드윅은 모두 톰슨의 제자이고 그의 제자 중 이들처럼 노벨상을 받은 이는 7명이나 됐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또 하나 있다면 케임브리지대나 산하 캐번디시연구소(1874년 설립) 출신이란 것. 톰슨은 세 번째 소장이었다.
캐번디시는 노벨상 수상자를 29명이나 배출한 143년 역사의 연구소. 그런데 노벨상에 관한 한 케임브리지대의 기록은 더 경이롭다. 수상자가 92명이나 되어서다. 그런 케임브리지대의 역사는 1284년 개교한 ‘피터하우스’라는 칼리지에서 시작됐다. 벌써 733년 전으로 지금의 31개 칼리지가 들어서기까지는 300년가량 걸렸다. 그럼에도 케임브리지대의 각 칼리지에선 수업과 연구가 옛날과 다름없이 진행된다. 영국의 칼리지 시스템은 독특하다. 입학생은 각 칼리지가 선발하지만 수업은 공유하고 졸업장은 케임브리지대에서 받는다.
교육 방식도 독특하다. 교수와 학생이 마주 앉아 토론과 대화로 지식을 전수하고 연구를 돕는다. 이건 수도원식 교육으로 이 전통은 애초 칼리지가 신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교육기관이란 점에서 왔다. 물론 변화도 있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이 한 명에서 두세 명으로 늘어난 것.
최고 인재만 모인 고색창연한 중세 전통의 대학도시를 보러 오는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신(新)고딕양식의 고풍스러운 건물, 주민 대다수가 교수와 학생인 2000년 역사의 중세풍 도시가 풍기는 매력. 세상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케임브리지의 매력이자 독특함이다.
런던시내에서 북쪽으로 한 시간 반쯤 고속도로를 달린 뒤에 도착(103km)한 케임브리지셔(Cambridge Shire·‘셔’는 행정단위). 양편의 거대한 플라타너스로 그늘이 드리워진 편도 1차로의 아름다운 길 퀸스로드(Queen‘s Road)로 들어서니 왼편으로 널따란 초원 뒤편으로 신고딕양식의 첨탑을 지닌 교회와 더불어 나지막한 건물이 줄지어 늘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가 칼리지 건물인 대학촌이다. ‘케임 다리’란 이곳 지명은 대학도시 케임브리지를 적시는 케임 강에서 왔다. 그런데 강이라곤 해도 개천 정도로 비쳤다. 수심이 채 1m도 안 되는.
그런데 초원의 풀밭과 뒤편 대학 건물 사이로 한 남자가 규칙적으로 긴 막대를 들었다 놓으며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그는 뱃사공이고 막대는 삿대였다. 케임브리지의 명물인 펀팅(Punting) 장면이었는데 풀에 가려 물과 배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펀팅은 바닥이 납작한 배로 1.6km를 이동하는 뱃놀이. 그런데 케임 강은 케임브리지의 목가적 풍경을 보존하기 위해 조성한 학교 뒷마당인 ‘더 백스(The Backs)’와 대학촌 사이로 흐른다.
그렇다 보니 뱃놀이객은 제각각 줄지은 칼리지를 속속들이 보게 된다. 이는 대학촌의 중심 도로에선 절대 볼 수 없는 광경. 왜냐면 영국의 건물은 ‘코트(Court)’라는 마당(中庭·중정)을 가운데 두고 사방을 둘러싼 형태여서다. 게다가 학교에선 방학을 제외하고는 늘 수업이 진행되니 교내 투어도 극히 제한된 시간에만, 그것도 유료로 진행된다. 그러니 400∼700년 역사의 학교를 한꺼번에 두루 편안히 감상하기에는 이 펀팅만 한 것이 없다. 애초 이 펀팅은 학생들의 여가활동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관광상품으로 바뀌었다.
차를 퀸스로드에 주차한 뒤 실버로드를 따라 걸어서 다리 건너 케임브리지 시내 대학촌에 들어섰다. 그 중심도로는 킹스퍼레이드, 트리니티스트리트, 세인트존스스트리트로 이어지는데 그 이름은 모두 그 길의 칼리지에서 왔다. 킹스퍼레이드엔 처음 퀸스로드로 진입할 당시 보았던 높은 고딕첨탑교회가 있는 킹스칼리지가 있다. 교회에 가려 학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교회는 웅장하고 아름답고 거대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이 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케임브리지의 모든 칼리지가 교회를 갖고 있다. 영국 교육이 기독교에 기초한 데서 온 전통이다.
거기서 재밌는 현상을 목도했다. 인문학에 강한 옥스퍼드대와 정반대로 케임브리지대는 과학에 몰두해왔다. 그런데 과학은 무신론을 이끄는 가장 큰 힘. 그런 형국에서 케임브리지대는 그걸 어떻게 극복해 왔을까. 나는 케임브리지 투어 중 그 대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글귀를 찾았다. 옛 캐번디시연구소(현재는 도보 30분 거리의 웨스트 케임브리지에 위치)의 육중한 나무 정문 윗부분에 라틴어로 새겨진 구약성서의 시편 구절에서다. ‘신의 작품은 위대하며 그건 그 안에서 환희를 느끼는 이들에게 물음을 던지게 한다.’ 자신들이 밝혀낸 위대한 과학적 사실도 따지고 보면 모두 신의 창조물이란 것이다.
1441년 개교한 킹스칼리지에선 총리가 20여 명이나 배출됐다. 하지만 설립자인 헨리6세 왕(1421∼1471)은 두 차례나 런던탑에 유폐당하고 결국은 50세에 암살당한 불운한 왕이었다. 또 영국이 소유했던 프랑스 영토도 거의 다 뺏긴 실패한 통치자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직 기억된다. 이 칼리지와 최고 명문 사학 이튼칼리지(버크셔주 소재 중고교)를 세워 대영제국의 기틀이 된 교육에 공헌해서다. 교내중정(Front Court)엔 그의 동상이 있다.
킹스퍼레이드를 따라 10분쯤 걸으니 첨탑 모습의 우아한 정문이 세워진 학교에 이른다. 헨리8세가 지은 트리니티칼리지다. 이곳은 정오가 지나야 방문을 허용한다. 들어가 보니 ‘그레이트코트(Great Court)’라는 중정을 네 방향에서 건물이 에워싼 형국이다. 창문으로 학생들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교내는 절간처럼 조용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학부수업은 교수가 학생 1∼3명과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돼서다. 토론은 학생이 과제를 스스로 해결해 온 터라 밀도 있게 진행된다. 대학원은 수업 자체가 없다. 대화와 토론, 실험과 연구가 전부다.
트리니티칼리지 출신 인사로 대표 선수를 들라면 당연히 아이작 뉴턴(1642∼1727)이다. 그는 여기에 입학해 운동법칙 등 물리학의 기본을 찾아냈다. 그가 지냈던 방은 정문 오른편 건물 안. 그 앞 잔디밭에선 뉴턴 사과나무가 자란다. 만유인력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사과나무의 후손인데 모수(母樹)는 여기가 아니고 그의 고향에 있었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독실한 성공회 신자로 창조주로 유일신은 믿었지만 예수만은 인간으로 본 것. 이건 교리의 핵심인 ‘삼위일체’(하느님 예수 성령은 하나라는 것)에 대한 부정. 더불어 이 트리니티칼리지의 교명과도 배치됐다. ‘트리니티(Trinity)’가 곧 ‘삼위일체’여서다. 찰스 다윈(1809∼1882)도 비슷하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성공회 신부가 되기 위해 케임브리지대에 입학(신학과)했다. 하지만 식물학과 지질학을 공부해 최고 성적으로 졸업(1831년)했고 세계일주 항해 비글호에는 박물학자로 동승해 ‘종의 기원’을 썼고 유전학을 확립했다.
킹스칼리지와 이웃한 퀸스칼리지는 헨리6세의 왕비가 세웠다. 네덜란드인 종교개혁자인 에라스뮈스(1466∼1536)는 여기서 ‘우신예찬’을 저술했다. 케임브리지 최초의 칼리지인 피터하우스는 초기컴퓨터 발명자 찰스 배비지와 제트엔진을 개발한 프랭크 휘틀을 배출했다. 2차대전 중 에니그마(Enigma·독일군 암호) 해독실장을 맡아 암호해독기 ‘봄브(The Bombe)’를 개발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1912∼1954)도 킹스칼리지 출신이다.
트리니티칼리지 옆 세인트존스칼리지(1551년 개교)는 1829년 이래 전통이 된 라이벌 옥스퍼드대와의 조정 경기를 처음 제안했던 학교로 계관시인(1843년) 윌리엄 워즈워스의 모교. 또 트리니티칼리지 앞 시드니서식스칼리지는 쿠데타로 찰스1세를 척결한 뒤 의회까지 해산시키고 종신 호국경에 올라 군사독재를 펼쳤던 올리버 크롬웰(1599∼1658)의 출신교. 그는 장로파에 의해 옹립된 찰스2세의 왕정 복구 후 부관참시 당해 머리가 런던시내에 효수된 인물. 그의 머리가 이 교정에 묻혀 있다고 전해온다.
※여행정보
찾아가기: ◇렌터카: 런던에서 M11고속도로로 103km(90분 소요) ▽주차: 도시 중심에도 주차장이 있지만 시 외곽에 있는 5개의 Park&Ride(무료주차)에 세우고 시내버스로 이동. ◇대중교통 ▽철도: 런던시내 킹스크로스와 리버풀스트리트의 역에서 탑승. 도시 중심은 시내버스(Citi 1·3·7번)로 오간다. ▽옥스퍼드∼케임브리지 이동: 케임브리지보다 먼저 생긴 대학도시 옥스퍼드는 케임브리지에서 자동차로 4시간 반 걸린다. 장거리 버스를 이용하면 오갈 수 있다. www.stagecoachbus.com, www.thebusway.info 참고.
시내투어: 일단 관광안내소에 들러 시내지도(무료)를 갖고 중앙로(킹스퍼레이드∼트리니티스트리트∼세인트존스스트리트)를 따라 걸은 뒤 펀팅과 골목길 투어를 한다. 칼리지 방문은 시간별로 입장을 통제하며 유료와 무료가 있으니 현장에서 확인하기를. ▽펀팅: 1.6km 뱃놀이(45분 소요)에 1인당 할인가 16파운드(어른 기준). 할인쿠폰은 관광안내소에서 구할 수 있다. ▽시장: 관광안내소 옆 광장에서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개장(오전 10시∼오후 4시). 일요일엔 지역민이 만든 예술 공예품 시장으로 바뀜. ▽관광안내소: www.visitcambridge.org
준비물: 유럽연합에 속해도 영국은 자국 화폐(파운드)만 고집한다. 유로화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전자제품을 쓰려면 두꺼운 세 발짜리 플러그만 통용되니 만능 콘센트를 준비할 것.
▼케임브리지 여행, 또 하나의 즐거움 ‘디 이글’ 펍▼
술집 외벽-생맥주 손잡이에 ‘이글의 유전자’가 왜
64년전 왓슨, 펍 뛰어들며 “찾았다”… ‘DNA 이중나선구조’ 첫 공표 장소 위대한 발견 기념 브랜드로 만들어 나의 케임브리지 여행에서 하이라이트는 펍 ‘디 이글(The Eagle)’에서 보낸 망중한이다. 영국의 펍(Pub)은 식사도 하고 술을 마시며 시간을 보내는 서민풍의 바 겸 식당. 메뉴는 영국 음식을 대표하는 피시앤드칩스(대구와 감자튀김)와 버거, 스테이크, 미트파이(빵 속에 고기를 넣은 것)가 대종. 1667년에 창업했으니 350년 역사의 올드 펍이다. 하지만 이날 여길 찾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1953년 2월 28일의 일이다. “찾았어, 찾았다고!” 이렇게 외치며 한 청년이 이 낡은 펍에 뛰어들었다. 펍 정면 골목(Free School Lane) 안 캐번디시연구소의 미국인 제임스 왓슨(당시 25세)이었다. 그런 그를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는 연구 파트너인 프랜시스 크릭(당시 37세). 둘은 매일 여기를 들락거리던 과학자. 아니, 실은 캐번디시연구소의 연구원 모두가 그랬다. 이글 펍은 연구소의 구내식당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 소란의 실체는 과연 뭐였을까. 그건 누구도 풀지 못했던 ‘생명의 비밀’을 알아낸 인류적 사건이었다. 유전자가 이중 나선 구조로 이뤄졌음을 밝혀낸…. 20세기 과학적 성취 중 가장 위대한 발견(두 사람은 1962년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 중 하나였던 이 사건. 여기도 그 현장 중 하나다. 그런데 이 펍의 바에서 포복절도할 광경을 접했다. 생맥주 탭(손잡이) 앞에 붙은 맥주 브랜드 때문인데 그건 ‘이글의 유전자(Eagle‘s DNA)’. 그럴 만도 하다. 인류의 위대한 과학적 발견이 최초 공표된 곳이 여기니까. 그래서 이글의 유전자란 브랜드도 그날 만들어졌다. 펍 외벽엔 그 과학적 발견이 예서 이뤄졌음을 알리는 동판이 붙어 있다.
디 이글: 케임브리지 도심의 베넷스트리트. 오전 8시∼오후 11시(일요일만 오후 10시 반 폐장). 현지 전화 01223 505020. www.eagle-cambridge.co.uk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