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루이스. 너 내 망아지 ‘달빛’ 알지? 내가 또또까 형한테 손잡이를 고쳐 달래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줄게. (…) 울면 안 돼, 너는 왕이니까.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J M 바스콘셀로스·지경사·1993년)
대선 즈음이었다. 안철수, 유승민, 심상정 세 후보가 감명 깊게 본 영화로 꼽았다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봤다. 영국 저소득층의 삶을 담담하지만 강렬하게 그려냈다. 늙고 병들어 실직한 목수 다니엘과 젊은 싱글맘 케이티는 모두 빈곤층이다. 다니엘은 실업 급여를 받기 위해 필사적으로 까다로운 절차들을 따라가려 해보지만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다. 케이티는 씩씩한 엄마지만 집에 먹을 것이 떨어져 간다는 궁핍과 두려움이 점차 그녀를 갉아먹어 간다.
영화의 잔상은 오래도록 남았다. 한 달이 넘게 지난 뒤 뜻밖의 장면에서 케이티가 떠올랐다. 어렸을 적 수없이 읽었던 낡은 동화책을 다시 펼쳤을 때였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자주 꼽히는 책이다. 잘 알려져 있듯 다섯 살 주인공 제제의 성장소설이다. 섬세하지만 악동이었던 제제가 처음엔 나쁜 어른이라 생각했던 뽀르뚜가 아저씨를 만나 변해 간다. 그를 통해 행복의 의미를 접하고 우정을 쌓게 되지만 뽀르뚜가는 불의의 사고로 제제의 곁을 떠난다.
다시 펼친 책에서는 어릴 때 그냥 넘겼던 장면들이 선명하게 마음을 울렸다. 크리스마스에 나눠 주는 자선 장난감을 받기 위해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맨발로 거리를 걷는 제제, “왜 어떤 사람들에겐 사는 게 이렇게 힘이 들까요”라며 눈물 흘리는 누나 글로리아, 아침 식사를 커피 한 잔으로 대신하는 이들의 모습이었다.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것이었지만, 가난의 얼굴이었다.
낯선 동네로 쫓겨 온 케이티의 낡은 집과 아이들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케이티는 마지막 남은 야채로 수프를 끓여 제 몫을 다니엘에게 내어준다. 다섯 살 제제는 크리스마스에 빈손인 동생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준다. 가난하지만 가난하지 않은 이들의 모습이 겹쳐져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문득 어른들의 동화로 느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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