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의 오랜 기간 동안 조선 독립을 꿈꾸며 용맹무쌍하게 활동한 조선 치안의 암(癌)이다.”
조선총독부가 만주에서 활동한 무장투쟁 세력인 ‘조선혁명군’을 평가한 내부 문건이다. 불치병에 비유할 정도로 일제는 조선혁명군 처리를 놓고 골머리를 앓았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앞마당이 된 만주에서 10년 가깝게 무장투쟁을 벌인 조직은 한국과 중국을 통틀어 조선혁명군이 유일하다. 비결이 무엇이었을까.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한일관계연구소장은 최근 내놓은 ‘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 양세봉’(역사공간·사진)에서 조선혁명군 장기 투쟁의 원동력으로 사령관 양세봉(1896∼1934)의 탁월한 지도력과 한인 동포들의 절대 지지, 중국인들과의 적극적인 연대를 꼽았다.
양세봉은 민족주의 계열임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모두에서 추앙받는 독립운동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가 그의 업적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데 이어 1974년 국립현충원에 가묘를 세웠다. 북측에서는 1986년 9월 평양 애국열사릉에 그의 시신을 안장했다. 이는 그가 일제에 맞서기 위해 좌우를 떠나 중국 국민당, 공산당과 손잡는 등 광폭 행보를 보인 사실과 무관치 않다.
장 소장은 “지주나 지식인이 다수였던 무장투쟁 지도자들 가운데 소작농 출신은 양세봉이 거의 유일했다”며 “소작농으로 생계를 잇던 간도 이주 조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데 힘써 사회주의자들한테도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만주뿐만 아니라 국내까지 잠입해 독립운동을 벌인 양세봉의 대담성도 빼놓을 수 없다. 조선혁명군은 1932∼33년 250여 명의 대원을 국내로 침투시켜 군자금 모집과 일본 관공서 습격 등의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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