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이름에 담긴 의미가 궁금했다. 중성적인 이름인 데다, 이름은 대개 어떤 뜻을 담고 있으니까.
“아버지가 1925년생이신데, 마흔 넘어 얻은 외동딸이 바로 나다. 여자로 태어났으니 삼종지도(三從之道)를 지켜 화목하게 잘 살라는 뜻으로 그렇게 이름을 지어주셨다.”
오빠가 셋이나 있었다. 외동딸은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아버지는 교도소나 보호감호소에서 재소자들을 관리하는 교정(矯正)공무원이었다. 집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안정적이었다.
공부는 반에서 늘 10등 안에는 들었다. 숙제는 잘 안 해가는 학생이었지만 성격은 꼬인 데가 없었다. 학교에서 하지 말라는 건 안 했고, 제대로 놀아본 적도 없다. 한마디로 아주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요즘 한국 연극판에서 제법 의식 있고, 선이 굵고, 이름도 알려진 연출가로 성장했다. 삼종지도를 따라 화목하게 살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꿈은, 시대에 맞던 안 맞던, 결혼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룰 길이 멀다. 더욱이 아버지께서는 3년 전에 돌아가셨으니….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반하며 살고 있다”면서 웃는 ‘그’는 연출가 문삼화(文三和·50)다. 그를 6월 7일 동아일보에서 만났다.
1. 연극을 향한 반란, 그리고 미국 도피
문삼화는 서울여대 원예학과를 졸업했다. 원래는 생물학과를 원했다. 1991년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서울 S종합병원에 취직해 1년간 트레이닝을 받고 M산부인과에서 3년간 연구원으로 근무하며 ‘어떤 일’을 했다.
“남자의 정자를 채취해 점액질을 제거하고 체액과 똑같은 물질 속에 넣어뒀다가 자궁 같은 인큐베이터 속에서 정자와 난자를 수정시키는 일을 했다. 수정이 잘됐는지를 확인하는 것까지가 내 일이다. 그 다음이 자궁 안에 착상시키는 것인데, 착상 전까지는 인간의 영역이지만 착상 여부는 신의 영역이다.”
‘어떤 일’은 시험관아기를 만드는 일이었다. ‘신의 조수’였지만 인간 문삼화는 매일매일 너무나 똑같은 일에 질려 반란을 꿈꾼다. 가족들에게 연극 공부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때가 28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뭐, 연극을 하겠다고? 그냥 시집이나 가!”
반대가 너무 심했다. 한 달 간 울고불고하다가 훌쩍 미국으로 떠났다. 내심 연극 전공으로 국내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으나 가족과 함께 있으면 아무 것도 안 될 것 같았다. “사실 아무 준비도 없이 미국으로 갔으니 도망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도피는 행복했다.
“한국 사람이 없는 아이오와로 가서 어학원에서 6개월간 영어를 공부한 뒤 곧바로 학사편입을 했다. 공부가 정말 재미있었다. 체질이었다. 유학 갔다 온 친구들도 영어 못하는 경우가 많은 데 나는 언어감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에서 공연할 때는 스태프로 참여했다. 무대감독보조나 조연출, 소품 담당 등을 하며 밤 10시까지 미국 친구들과 영어를 쓰니 실력이 팍팍 늘었다.”
그는 영어를 잘했다. 그렇다고 미국 친구들이 그의 말을 잘 들어줬다는 뜻은 아니다. 까놓고 얘기해서 무시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메모다. 내가 생각한 것을 메모로 정리해서 전달했다. 그걸 보고 스태프와 친구들이 놀랐다. 예리하게 보고 있구나, 해서”
그는 노던 아이오와 대학(University of Northern Iowa)에서 연출 전공으로 학사학위를 받았다.
“노던 아이오와 대학 학부에서 5학기동안(3년) 연출을 배웠다. 그리고 뉴욕 브로드웨이로 가서 2년간 현장을 익혔다. 연출을 전공한 이유? 연출이 뭐하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연출을 전공하면서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연출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사실 이 고민은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부터 했다. 어쩌면 가장 큰 문제는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는 것일 것이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고민을 했다고? 그렇다. 그는 서울여대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다.
“대학 개교와 역사가 비슷할 정도로 전통이 있는 동아리다. 이 곳에서 3년간 배우로 네 번 무대에 섰다. 쇼트커트하고 남자역만. 몰리에르의 ‘위선자 타르튀프’에서 발레리 역, 교수와 도둑이 나오는 이근삼의 ‘거룩한 직업’에서 교수역을 맡았다.”
대학 연극반에 들어가도록 만든 민들레 홀씨는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창덕여중을 다닐 때 교장선생님이 단체관람을 많이 시켰다. 연극이나 영화는 물론이고 음악회까지. 연극은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와 ‘사운드 오브 뮤직’, 알퐁스 도데의 ‘별’ 등을 유관순기념관이나 세종문화회관 별관(지금의 서울시의회) 등에서 본 기억이 남아 있다. 진명여고를 다닐 때는 별로 공연을 못 봤고, 재수를 할 때 자주 봤다. 마당 세실극장 같은데서”
그럼 아예 연극영화학과로 진학하지, 생물학은 뭐고 원예학은 뭔가.
“연극영화학과는 ‘날라리’나 아주 예뻐야 간다고 생각했다. 나는 어느 쪽도 아니었다. 그래서 꿈도 꾸지 못했다.”
중학교에서의 관극 경험이 대학연극반으로, 대학연극반의 경험이 미국으로 등을 떠민 것 같다. 그리고 그는 지금 연극판에서 살고 있다. 때로는 걱정도 하지만 대체로 즐겁게.
2. 유인촌과 극단 유
문삼화는 미국에서 귀국한 후 1999년부터 2009년까지 배우 유인촌이 이끄는 ‘극단 유’에 몸을 담고 연출로 일한다. 그는 “나는 유인촌 대표님이 키운 연출이다. 그는 나에게 영원한 대표님”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그의 연출 데뷔작은 2003년의 ‘사마귀’(알레한드로 시비킹 작, 문삼화 역). 이 작품은 그해 한국연극평론가협회선정 올해의연극 베스트3에 올랐다. 이듬해인 2004년 연출한 ‘라이방’(송민호 작)은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젊은연출가전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라이방’에는 라이방 안경을 쓰는 택시 기사 3명이 나온다. 그러나 꼭 택시 기사가 아니어도 좋다. 후줄근한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기도 하고, 그런 인생에 볕을 들이기 위한 노력도 한다. ‘라이방’이 그해 가을 서울 대학로 게릴라극장의 초청을 받았을 때 그는 이런 인터뷰를 했다.
“힘들어도 웃고 지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사람을 보면 기운이 나고 보기 좋잖아요. 이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마지막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자신들의 일들을 가볍게 웃어넘기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너무 좋아요. 세상은 살아 볼만하고 미소 지을 수 있는 내 모습을 희망하며 스스로에게 위로하죠. 그래도 인생은 아름다울 수 있다고요”(2004년 한국연극 9월호).
벌써 13년 전이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을까. 그는 “내가 그런 말을 했나요. 지금 들어보니 굉장히 오글거리네요”라고 했다. 즉답은 피했지만, 마음 어느 한켠에는 아직도 그런 ‘따뜻함’과 ‘긍정의 힘’이 남아있으리라.
본인은 본인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물어봤다.
“너무 쉽게 사는 게 아닌가하고 걱정할 때가 있다. 운이 좋아서 연출도 하고, 고생도 별로 하지 않았다. 나는 연극학과 출신도, 극단 출신도 아니다. 그런데 ‘라이방’으로 주목을 받자, 어느 날 누가 술에 취해 ‘대체 어디서 나타나서 설치고 다니냐’고 했다. 내가 일찍 공연지원금을 받은 것에 화가 났던 모양이다. 나도 말대꾸를 했다. ‘그러게, 왜 오래하고도 지원금을 못 받았대!’”
다시 ‘극단 유’ 얘기가 나온다.
“유인촌 대표님은 제작비에 신경을 안 쓰도록 만들어줬다. 연출료도 늘 따로 챙겨주셨다. ‘사마귀’가 주목을 받은 것도 ‘극단 유’의 후광이 없었다고 말 못한다. 지원금도 보통 10년은 돼야 받는데 나는 4년쯤 돼서 ‘사마귀’를 연출 때 이미 받았다. ‘운9 기1’이었다. 독립을 해 대표가 되고나서부터 제작이 힘든 줄 알았다. 지금은 여자 연출이 많지만 그때는 여자 연출도 적었다. 그것도 운이다. 내가 받은 혜택을 다른 곳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극단 유’에 있을 동안의 에피소드 하나. 그는 2000년 8월부터 2년 4개월 동안 부업으로 시사영어사 역삼동 ELS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오전 7시부터 시작하는 아침반을 맡았는데 한달 월급이 150만원으로 짭짤했다고 한다. 그런 사실을 단원들이 모두 알고 있었고, 술도 많이 샀다고 한다. 지금도 부업을 하는 연극인들은 많다. 영어강사도 있을까?
3. 공상집단 뚱딴지와 터닝 포인트
유인촌 대표는 문삼화 씨에게 “머리가 크면 분가하는 게 맞다”고 했단다. 굳이 독립할 생각은 없었으나 2008년 ‘공상집단 뚱딴지’의 창단모임을 갖고 대표가 된다. 본격적으로 활동을 한 것은 연극협회에 등록한 이듬해 2009년부터.
“200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뚱딴지가 뚱딴지같은 얘기를 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지금은 단원이 25명이지만, 시작할 때는 5명이었다. 남녀 배우 1명씩에 스태프, 작가, 음악 담당이 다였다. 창립멤버 중에는 지금 남자 배우 오민석 1명만 남아 있다. 신입단원은 신뚱이라고 하고, 나는 맏뚱이다. 처음에는 내가 일일이 나서서 단원들과 소통을 했으나 지금은 그렇게 못하고 황이선 연출(40)과 배우인 김지원 부대표(45)가 주로 한다.”
그의 변화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 ‘고령화 가족’(천명관 원작, 공동각색, 2011년 뚱딴지 5회 정기공연)과 ‘일곱집매’(이양구 작, 연우무대 제작, 2013년)다.
“뚱딴지를 시작하면서 나는 ‘예술’을 하고 싶었다. 번역극이나 철학적인 것, 즉 어려운 것에 끌렸다. 현실에는 없을 듯한 것에. 나는 그것이 연극이 영화와 다른 점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걸 나의 사명이라 생각했다. 2009년 뚱딴지 2회 정기공연으로 ‘거리의 사자’(쥬디스 톰슨 작, 문삼화 역)를 한 적이 있다. 사회의 어두운 그늘을 옴니버스식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동창이 이런 말을 했다. ‘내 삶도 힘들어 죽겠는데, 극장에 와서까지 힘들어야 하느냐’고….”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내가 너무 잘난 척 하는 건 아닌가.’ 그때부터 그는 ‘난해한 작품’에서 눈을 떼고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가 결실을 맺은 게 ‘고령화 가족’이다. 고령화 사회를 대비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독립해서 효도를 해도 시원찮을 마당에 70대 홀어머니에게 빌붙어 사는 2남1녀의 나이가 많다고 붙인 일종의 패러디다. 콩가루 집안의 후레자식들 얘기지만, 웃음과 온기, 가족 재생의 가능성을 남겨뒀다.
'일곱집매'는 평택기지촌에서 살아온 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황혼을 들여다본 작품이다. 평범하게 살아온 문삼화가 사회문제에 눈을 뜨는 계기를 마련해 줬다.
“우리 옆집 얘기이자, 건넛집 할머니 얘기다. 이 작품을 하면서 나도 공부를 많이 했다. 처음에는 기지촌 할머니들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기지촌 할머니를 감히 어디다 위안부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고. 그러나 사회적으로 지켜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에서는 기지촌 할머니들도 다를 게 없다. 남성으로 대변되는 사회적 폭력과 착취 앞에 무방비로 버려진 채, 겉으로는 자기발로 간 거 같지만 사실은 누군가에게 떼밀려 간 것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점차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일곱집매’는 상도 따랐다. 2013년 서울연극제 우수작품상과 여자연기상, 한국연극 베스트 7, 제1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연극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자신에게 변화를 가져다 준 계기로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들었다.
“나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다. 우연히 노 전 대통령의 노제를 TV로 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의 삶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 뭘 위해, 누굴 위해 살고 있지? 나만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때부터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왕창 바뀌지는 않았지만, 차츰 작품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예전의 친구들이 지금의 나를 보면 놀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은 자연스레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고발하는 ‘2016 권리장전 검열각하’에도 참여하게 만든다. 그는 ‘대한국사람’(뚱딴지 공동창작, 문삼화·황이선 공동연출)이라는 작품을 올렸다. 한번도 중심부에 서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 ‘김대열’이 역사의 소용돌이 휘말려 종국에는 검열기관에 취직하는 아이러니를 코믹하게 그렸다. 그러니 ‘대한국사람’이라는 것도 과장이다. 김대열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딸이 하는 말에 이 연극의 비수가 숨어있다. “왜 아무도 안 와요.”
2014년에 공연한 ‘바람직한 청소년’(이오진 작)이라는 작품도 그의 이름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이 작품은 CJ문화재단 크리에이티브 마인즈 사업이 그에게 연출을 맡긴, 이른바 제작사 작품이다. 그가 “공연을 올리고 반응이 너무 좋아서 깜짝 놀랐다”고 할 절도로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 작품은 고등학교라는 공간에서 게이 학생, 불량학생, 왕따 피해자, 폭력 교사 등의 등장인물이 부딪히며 보여주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간의 갈등과 화해의 이야기다. 대체로 거칠고 어둡지만 코믹한 장면도 적지 않다. ‘바람직한’이라는 말도 ‘고령화 가족’처럼 반어법이다.
대부분은 이 작품을 ‘문제 청소년’들의 성장통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어른들의 세계를 그저 고등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연기했을 뿐이라고. 연극의 등장인물과 그들이 겪는 일들은 모두 어른들의 거친 사회 속에도 고스란히 존재하기 때문이다(스토리라인 중에서 동성애코드가 너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극의 마지막에 게이학생과 불량학생이 선생님 앞에서 소리 높여 반성문을 읽고 선서를 하고나서야 다시 학교에 다니는 걸 허락받는 장면이 특히 그렇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며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속으로 사표를 쓰면서도 겉으로는 내색조차 못하는 샐러리맨들의 비애를, 금세 떠올렸다. 나는 문 연출에게 이런 내 생각을 얘기했고, 그는 “관객이 그러면 그런 것 아니겠느냐”며 수긍했다. 하기야 그도 이 연극을 어른들이 봤으면 좋겠다고 했으니.
4. 배우와 번역과 미래와
연출과 배우, 배우와 연출의 관계는 늘 관심거리다. 소통 방법에 대해서.
“결국은 배우를 도구로 쓰느냐, 아니면 같이 가는 동등한 생명체로 보느냐는 차이일 것이다.”
문삼화는 후자를 지향한다.
“이 작품은 이런 얘기다, 주제는 이거다, 하는 순간 배우가 주제를 말하기 시작한다. 주제를 말해야 하는 배우가 있긴 있다. 그러나 모든 배우들이 주제를 얘기하면 주제 과잉이다. 갈등도 줄어들고, 재미도 없어진다. 그래서 나는 연출의 디렉션(지시)이 배우를 가두는 걸 경계한다. 어떤 배우에게 어떤 말을 하면 그것만 하는 배우가 있다. 특히 어린 배우들이 그렇다. 연출의 지시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가끔 내가 배우들을 틀에 가두고 있음을 깨닫고 반성할 때도 있다.”
그의 이런 철학이 ‘2인극 연출의 1인자’라는 말을 듣게 된 연유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대가 너무 강하지 않도록 한다. 화려한 무대도 15분 정도 지나면 효용이 떨어진다. 결국은 배우가 중심이다. 2인극이야말로 배우 중심의 연극이다. 그러다보니 2인극을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의 작품에 출연한 배우 중 8명이 연기상을 받았다고 한다. 제법 많은 것이라고 한다(그에 비해 연출상은 적은 감도 없지 않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는 “연출가는 절대 작가를 이길 수 없다”는 말을 한 적도 있다. 이는 작품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연출은 어디까지 해석이 가능한가”라고 물어봤다.
“마음껏 열려있다고는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가능하다. 작가가 쓴 길이 아닌 다른 길로는 못 간다. 돌아갔다가 올 수는 있어도.”
해석과 비틀기는 인정해도 작품을 완전히 해체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그렇지만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다.
“작가는 언어만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무대는 살아있는 사람이 만든다. 대본을 쳐내는 걸 이해해야 한다. 말은 중요하지만 말만 중요하지는 않다. ‘바람직한 청소년’ 마지막에 선서 장면이 나오는데, 대본에서는 마지막에 있던 것도 아니고, 강조되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연출과 배우가 마지막으로 옮겨서 강조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제가 작업한 연극들은 사실주의 작품들이지만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건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부조리극이에요, 좋아하는 작가는 체호프이고요”라고 한 적도 있다. (뉴스컬쳐, 2015년 7월)
의외여서 다시 물어봤다. 진짜냐고.
“부조리극이 모순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드라마가 뻥이다. 부조리가 우리 삶에 가깝다. 연극도 사실은 다 뻥이다. 부조리야말로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나의 작품 멘토다. 보기에 쉽게 연출할 수 있다. 아, 이게 인간이구나하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내년에 부조리극을 하나 꼭하고 싶다. 너무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작품을 찾아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는 하우(How)에 신경을 써 왔지만, 앞으로는 왓(What)에도 신경을 쓰겠다고 했다. 작품 해석이나 테크닉보다는 작품의 본질에 더 관심을 갖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후학들에게도 펼쳐놓는다.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연극원, 서울여대 교양학부, 송담대 뮤지컬학과, 중부대 연극영화학과에 출강하기도 했다.
문삼화를 얘기하며 번역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지금까지 17편을 번역했다. 그중 11편은 본인이 연출했고, 3편은 다른 연출이 무대에 올렸다. 3편은 서랍 속에 있다. 그는 요즘 테네시 윌리엄즈의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를 번역중이다. 오는 10월 예술의전당이 공연하는데, 그가 연출을 맡는다. 그가 번역 전문가로도 대접을 받는 이유는 영어실력도 실력이지만, 무대와 언어를 아는 연출가이기 때문이다. 문학적 번역이 아니라 무대적 번역에 강하다고나 할까.
“번역이 끝나면 연출도 끝난다. 번역은 잘근잘근 씹어 먹는 것이다. 무대를 그리는 것이기도 하다. 굉장히 재미있다.”
그가 예전에 했던 인터뷰를 읽으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연극 밖에 없으니까, 계속 연극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관심을 끌었다.
뭔가 쫓겨날 것 같은 두려움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두려움이 있다면 가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의미 없게 느껴질 때다.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러면서 그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게 삶의 모토라고 했다.
“연극은 보고 싶은 사람보다 하고 싶은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아마추어집단도 많다. 아마추어 그룹과도 작업을 하는 이유다. 극을 통해 위로와 치유를 받는 경우도 많다. 그게 연극의 힘이다. 영화는 호흡이 끊어진다. 그러나 연극은 한 호흡으로 간다. 나중에 보따리장사가 되고 싶다. 아마추어 커뮤니티에 직접 들어가 그들을 배우로 삼아 작품을 만들고 싶다.”
문삼화는 2013년 김천소년교도소 재소자들을 배우 삼아 뮤지컬 ‘경호의 꿈’(이양구 작)을 연출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소장으로 근무했던 곳이기도 해 감회가 남달랐다고 한다. 고교 연극반이나 직장인 워크숍, 아마추어 배우교실에도 나간다. ‘보따리장사’를 위한 준비라고나 할까.
그는 2014년 제16회 김상열연극상을 받았다. 특정 작품에 주는 것이 아니라 종합상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심사평은 문삼화의 일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그래서 전문(全文)을 인용한다. 단어가 어렵긴 하지만 눈 밝은 독자라면 위에 언급한 내용들이 모두 심사평에 녹아있음을 눈치 챌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주목한 것은 그녀의 변화된 문제의식과 도전의식이었습니다. 문삼화 연출의 관점 이동과 변화는 아직도 그녀가 안주하지 않고 동시대와 인간, 연극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진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출이 마주하고 있는 예술성과 상업성, 적극적인 발언과 응시적인 무언, 형식의 실험과 형식의 답습 등이 생산해내는 폐쇄된 구조, 더 나아가 연극계의 편향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최근작 ‘바람직한 청소년’은 사회적 문제와 개인의 존재론적인 문제, 이 두 씨줄과 날줄이 서로 부딪히고 춤을 추듯이 인간의 존재론적 성장을 역동적으로 직조한 작품이며 문삼화 연출의 변화된 문제의식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작년에 공연된 ‘일곱집매’를 분수령으로 나타난 것으로, 한국 사회의 모순과 병폐에 대한 문제의식, 즉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입니다. 문삼화 연출은 그녀의 사회적 문제의식을 일상적이고 코믹한 기법으로 담금질하여 무대 위 배우의 신체와 캐릭터를 통해 날 것처럼 제조하여 관객들에게 무장해제와 비판적인 시각, 동시대적 감수성으로 생동감이 넘쳐나는 무대를 제공합니다. 또한 그 무대가 던지는 밝고 힘찬 메시지는 한국 사회의 병든 징후를 넘어서 삶을 버티며 견디는 인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 까닭은 그녀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향이 사람에 대한 애정과 솔직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소들은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켜 그녀의 고유한 작품세계를 창출해주고 있습니다.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변화와 진화를 일으키며 구축하는 그녀의 작품세계는 심사위원들에게 신뢰감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합니다.”
그는 지금 서울 마포의 어머니집에서 막내 오빠(56)와 살고 있다. ‘함께’ 살고 있다기보다는 같은 집에서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는 게 맞을 듯하다. 구태여 그걸 밝히는 이유는 막내 오빠의 남매, 즉 조카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남자 조카는 31살, 여자 조카는 26살이다. 둘 다 대학원에 다니고 있는데, 내 작품을 열심히 봐 준다. 내가 어렸을 적부터 아이들을 세뇌시킨 결과다. ‘고모는 뭐라구?’ ‘가난한 예술인~’ 내가 공연하는 편수가 많은데도 궁금해 하면서 거의 다 봐 준다. 고맙고 감사하다.”
문삼화는 조카들에게 감사하며 살고 있지만, 그 감사는 어쩌면 그가 관객들로부터 받은 감사의 한자락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척박하다는 연극판에 누군가가 뿌리를 내리고 있음에, 더욱이 기뻐하고 있음에 늘 감사해야 한다.
(문삼화가 연출한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사마귀’ ‘라이방’ ‘G코드의 탈출’ ‘외계인의 열정’ ‘Getting Out’ ‘레티스와 러비지’ ‘백중사 이야기’ ‘말괄량이 길들이기’ ‘모든 건 타이밍’ ‘기억’ ‘너 때문에 산다’ ‘잘자요, 엄마’ ‘거리의 사자’ ‘다음역’ ‘루미오와 소리엣’ ‘언니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안녕, 피투성이 벌레들아!’ ‘고령화 가족’ ‘’바람이 들려준 이야기‘ 비잔틴 레스토랑’ ‘세자매’ ‘가정식 백반 맛있게 먹는 법’ ‘일곱집매’ ‘그 때 그 사람들’ ‘바람직한 청소년’ ‘정말이야’ ‘창작 뮤지컬 균’ ‘맨 프롬 어스’ ‘맘모스 해동’ ‘먼로, 엄마’ ‘뽕짝’ ‘기억의 체온’ ‘거미여인의 키스’ ‘지상 최후의 농담’ ‘맴’ ‘그렇게 살아진다’ ‘오사카 맥베스’ ‘12 Angry Men’, ‘밥’ ‘핑키와 그랑조’ ‘들판에서’ ‘블랙버드’ ‘대한국사람’ ‘인간’ ‘소나기마차’ ‘슬루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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