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형의 생각하는 미술관]<76>관계의 회복, 존재의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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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레데리크 바지유, ‘가족 모임’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 ‘가족 모임’
1860년을 전후로 프랑스 파리에는 진부한 미술을 넘어서려는 일군의 미술가들이 있었습니다. 거창한 사건 대신 일상적 경험에 주목했던 이들은 정기적으로 예술 모임을 가졌지요. 회합 장소는 주로 모임을 주도했던 마네의 작업실이나 카페 밀집 지역이었던 바티뇰이었어요.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1841∼1870)는 ‘마네파’ 혹은 ‘바티뇰 그룹’으로 불린 모임의 일원이었어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의학도를 꿈꾸던 화가는 미술품 수집가였던 아버지 지인의 소장품을 보며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었지요. 부친의 친구는 쿠르베의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에도 화가의 후원자로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화가는 의학 공부를 하러 간 파리에서 본격적인 미술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미술 공부를 시작했고, 예술적 교류도 시작되었어요.

미술가는 종종 그림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유난히 키가 큰 화가는 등장인물이 여럿인 그림에서조차 단번에 존재감을 발휘하곤 했지요. 하지만 예외인 그림도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동생, 이모와 조카를 함께 그린 ‘가족 모임’이 그렇습니다. 화가는 11명의 등장인물 중 화면 맨 왼편 끝에 있습니다. 그나마 앞에 선 삼촌에게 가려 모습이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림의 구석, 나무 그늘 아래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화가가 그림 속 가족의 일원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여름휴가 기간 고향 근처 집안 소유지에서 제작한 그림은 화가에게 영예를 안겨주었어요. 여러 차례 광범위하게 수정해 살롱전에 출품한 그림은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지요. 그림은 가족들에게도 의미가 각별했을 것입니다.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했던 29세 미술가가 그림 속 가족들을 남긴 채 전사했거든요.

노숙인 인문학 수업 중 자신만의 명패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대리와 팀장, 세입자와 입주자 등. 최고경영자와 건물주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갈망하는 시대, 수강생들 이름 앞 직위와 소망은 상대적으로 소박했습니다. 그런데 ‘종친회 회장’을 명패에 써 넣은 수강생이 있었습니다. 늘 강의실 맨 앞자리에 앉아 필기까지 열심히 해 수업에 힘을 실어 주던 분이었어요. 틀어진 일상보다 조각난 관계 회복이 다급한 현안일 줄은 짐작도 못 했기 때문이었겠지요. 명패를 세워두고 강의에 집중하는 수강생이 그림 속 가장 후미진 곳에 서 있는 화가처럼 보여 잦은 말실수 끝에 가까스로 수업을 마쳤습니다.

공주형 한신대 교수·미술평론가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가족 모임#마네파#바티뇰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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