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후하고 장대한 판형에 묵직한 분량. 존재감 넘치는 책이다. 파사드(facade)는 건물의 정면을 의미하는 단어다. ‘얼굴’이란 뜻의 ‘face’와 어원이 같다. ‘서울의 얼굴’ 혹은 ‘서울의 정면’, 이런 의미의 제목을 가진 책이다. 이런 제목에 이렇게 묵직한 물성의 책이면 그 내용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서울을 대표할 만한 최신 건축물이 나열돼 있으려나.
그런 생각은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무너진다. 어디를 봐도 눈길 끄는 화려한 건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 반대다. 설명을 읽지 않으면 도대체 어디 있는 건물인지조차도 알기 어렵다. 이 책의 주인공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서울 구도심의 낡고 초라한 건물들이다. 건물명이랄 것이 없고 있어봐야 독자들이 알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에, 건물명 대신 주소만 기재했다. 을지로 123, 칠패로 12-16, 만리재로 188, 두텁바위로 160….
건축가 권태훈과 사진가 황효철의 집요한 시선 속에서 이 건물들은 어마어마한 공력으로 빚어진 도면들, 그리고 건물의 초상화라고 할 만한 일련의 사진들로 다시 태어났다. 권태훈의 해부학 보고서 같은 글은 이 책을 사려 깊음의 기념비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나는 서울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에게 무가치하게 여겨졌던 건물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이야말로 누군가 꼭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그래서 이 작업을 대하는 지금의 나는, 죽음을 앞둔 어르신들의 영정 사진을 찍는 사진가의 마음처럼 간절하다.”
수록된 도면들의 완성도는 한마디로 압권이다. 기계적 정확성, 부분과 전체의 관계 밝힘, 빛과 그림자의 구분, 선의 위계 등 모든 요소가 엄격한 통제 속에서 풍성한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준다.
타일 줄눈의 선을 따라가다 보면 창틀이 구성되고, 그것들이 모여 다시 건물 전반의 구조로 이어지다가 어느덧 외곽선을 이뤄 건물 밖 도로와 만난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납작한 2차원이 아니라 울퉁불퉁한 3차원이다.
건물이 돌과 콘크리트와 유리로 구성된 실물이라면, 건축은 조직화된 정보다. 정보는 실물과 또 다른 그 자체의 독자적 생명과 의미를 갖는다. 그 어떤 말로도 이 책처럼 건축의 생명력을 잘 보여주기 어렵다.
이 책은 통상적인 건축 도면 자료집이 아니다. 도면 형식을 빌린 회화다. 정보의 가치 못잖게 미학적 가치를 추구했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결국 사라져가는 평범한 건물에 질서와 비례로 충만한 수많은 소우주가 숨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을 접하고 나면 오래된 건물을 철거하는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워질 거다. 소우주를, 어떻게 쉽게 없앨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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