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인생의 책 한 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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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자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1454∼1504)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면서 평생 ‘소학’을 읽고 체득하는 데 힘썼다. 김굉필의 친구 남효온이 말했다. “김굉필은 매일 소학을 읽어 밤 깊은 뒤라야 잠자리에 들었고 닭이 울면 일어났다. ‘공부해도 천리를 알지 못했는데, 소학을 읽고 나서야 지난 잘못 깨달았네’라고 시를 짓자 점필재 선생이 ‘이는 곧 성인이 될 수 있는 바탕이다’라고 평했다.”

도산 안창호의 인생의 책은 중국 근대 계몽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이었다. 20세기 초 한용운, 신채호, 박은식, 장지연 등 조선의 많은 지식인이 이 책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도산은 평양 대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이 책을 교재 삼아 가르쳤고,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묻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크게 용빼는 일만이 나라 일이 아니오.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이란 책을 몇 권 사서 삼남에 있는 유명한 학자들에게 주어서 읽게 하시오.”

전후 독일의 초대 총리로 ‘라인강의 기적’을 이끈 것으로 평가받는 콘라트 아데나워는 나치에게 탄압을 받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은거했다. 이 시기 독서로 소일한 그는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의 단편 ‘태풍’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전혀 영웅답지 않은 한 과묵한 선장이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 보여주는 도덕적 용기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데나워는 나중에 그 시기를 “나의 인격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던 유익한 때”였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의 공학도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기계공학을 연구하던 1911년에, 러셀과 화이트헤드가 쓴 ‘수학의 원리’(1910∼1913년)를 접했다. 이를 통해 그는 수학의 철학적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케임브리지대로 러셀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공학도 비트겐슈타인이 철학도가 되면서 20세기 언어분석철학의 큰 흐름이 시작된 순간이다.

인생의 책 한 권을 꼽아보라는 요청에 선뜻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함석헌의 시 ‘그 사람을 가졌는가’에서 사람을 책으로 바꾸어 스스로 물어보자.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책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책을 그대는 가졌는가…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 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책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책을 그대는 가졌는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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