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너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 하시고 사탕수수 밭에 들어가셨다. 혹시라도 내가 낫이나 끝이 날카로운 사탕수수 잎에 베일까 그렇게 얘기하셨던 것이다. 남자들이 사탕수수 대를 잡고 낫으로 자르면, 여자들은 가지 단을 만들고 한쪽 귀퉁이에 모은다. 해가 질 무렵이 되면 트럭에 실어 마을의 가공공장으로 간다. 즙을 내 큰 솥에 넣고 오랫동안 졸이면 원당이라는 흑설탕 덩어리로 완성된다. 오키나와 특산물이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사탕수수 모종을 비스듬히 꽂으면, 나는 그 위에 흙을 덮고 물을 줬다. 한여름 땡볕에도 부지런히 물을 주면 금방 자라나 밭에 갈 때마다 키 재기를 했었던 기억이 난다. 빨리 크는 사탕수수가 부럽기도 하고, 또 내가 키운다 생각하니 뿌듯하기도 했다. 사탕수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수확 시기가 된 것이다. 바람이 부는 날에는 사탕수수 잎이 서로 부딪쳐 흔들리는 소리를 듣기도 하고, 밭을 놀이터 삼아 술래잡기를 하면서 여름을 보냈다.
서양 사람들은 배우자나 자녀를 부를 때 허니, 스위티, 스위트하트 등 ‘단맛’을 사랑으로 비유한 호칭을 많이 쓴다. 하지만 이렇게 달콤한 설탕의 역사에는 사실 슬픔이 많이 배어 있다. 영화 ‘뿌리’에는 사탕수수 경작에 이용된 미국 흑인 노예들의 슬픈 삶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본에서의 설탕 교역은 1543년 포르투갈 선박이 총과 실크, 담배, 설탕을 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빵과 케이크를 만드는 법도 가르쳐 주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나가사키 카스텔라와 설탕을 판에 눌러 만든 슈거캔디로 발전했다. 17세기 에도시대에는 황실과 장군들만 먹을 수 있었다. 설탕은 의약품으로 구분되어 치료 용도로 약국에서 판매되기도 했다. 18세기 중엽에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면서 설탕의 수요가 급증한다. 거의 모든 요리에 사용되었으며 요리의 기본양념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일본 요리는 사실 간장과 식초, 된장, 다랑어포 그리고 설탕이 맛을 좌우하는 양념이 되면서 발달했다.
초등학교 시절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자주 가던 두 군데가 있다. 한 곳은 여름에는 팥빙수를, 겨울에는 단팥죽을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한여름 얇게 저민 얼음을 수북이 쌓고 달콤한 팥을 올린, 시원하고 달콤한 그 맛이 환상적이었지만 그것보다 예쁜 여학생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라 더 자주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또 한 곳은 아저씨가 길모퉁이에서 설탕을 녹여 캐러멜을 만드는 곳으로, 소다를 사용하는 한국의 뽑기와는 조금 다르다. 동물이나 별, 하트 모양 틀로 눌러주면 그 모양대로 떼어 더 큰 것을 돌려받는 것은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 뽑기는 설탕을 녹여 캐러멜 맛이 나도록 높은 온도까지 익히기에, 찍어낸 모양대로 떼어낸다는 것은 시작부터 거의 불가능한 게임이다.
세계 3대 진미 중 하나로 꼽는 ‘푸아그라’는 사과나 무화과, 포도 또는 포트와인 등 달콤한 재료와 아주 잘 어울리는 식재료다. 나는 양념한 거위간 조각을 꼬치에 꽂아 솜사탕으로 씌운 요리를 밸런타인데이, 크리스마스 때 깜짝 이벤트로 개발했다. 토끼나 메추리, 오리, 사슴 고기도 오렌지나 체리, 크랜베리를 이용한 캐러멜소스와 아주 잘 어울린다.
최근 젊은 요리사들은 고칼로리의 진한 디저트보다 야채를 이용한 디저트들을 내놓고 있다. 미국 뉴욕의 미슐랭 레스토랑 ‘르 베르나르댕’은 가지나 비트, 토마토를 이용해 향과 고유의 당분을 이끌어 내는 요리로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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