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북카페]과학을 신봉하는 여자와 시골 목사의 ‘사랑과 전쟁’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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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올해의 소설상’ 수상… 세라 페리의 ‘에섹스의 뱀’

5월 8일 밤 영국 런던의 고급 호텔인 파크레인 그로스브너 하우스에서는 지난해의 출판계 성과를 돌아보며 자축하는 영국 출판대상 시상식이 열렸다. 1858년 창간된 잡지 북셀러가 주관한 이 행사에서는 올해의 책, 서점, 작가 등을 선정하고 큰 성과를 낸 편집자, 저작권 담당자, 홍보 담당자 등 출판업 종사자들에게 상을 안겼다.

이날 밤 이제 겨우 두 편의 장편소설을 펴낸 작가 세라 페리가 ‘에섹스의 뱀(The Essex Serpent)’으로 올해의 소설상을 받았다. 맨부커상 수상작 ‘셀아웃’, 코스타문학상 수상작 ‘끝없는 나날들’, 베스트셀러 ‘뮤즈’ 등 쟁쟁한 작품을 모두 제쳤다. 출판사 서펀트 테일 측은 “소설 판매량을 5000부 정도로 예측했는데 지난해에만 10만 부 넘게 팔렸다”고 밝혔다.

이 책은 1890년 말 병리학에 대한 관심이 컸던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찰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후 또 다른 인간의 조상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상류층 부인들 사이에는 화석으로 만든 장신구가 유행했다.

고위 관료였던 남편을 병으로 떠나보낸 코라 시본은 자폐증을 앓는 아들과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집사 마사와 함께 에섹스로 향한다. 코라는 생전에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고 지성을 인정해 주지 않던 남편의 죽음에 무감한 채 새 환경의 해방감을 만끽한다. 어느 날 그녀는 얼마 전 발생한 에섹스 지진 이후 갈라진 땅의 틈 사이에서 나온, 마력을 지닌 뱀의 이야기를 접한다.

그리고 얼마 뒤 얼굴과 몸이 뒤틀린 채 뭔가에 놀란 듯한 표정을 한 소년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뱀에 대한 소문이 더 널리 퍼진다. 진화론과 생물학에 관심이 컸던 코라는 뱀이 나타났다는 마을로 향하고, 그곳에서 작은 교회 목사로 일하는 윌리엄 랜섬을 만난다. 자유분방한 코라와 선량한 가장 윌리엄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강렬하게 끌린다.

뱀의 존재를 믿으며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코라와 달리 윌리엄은 뱀에 대한 이야기는 미신일 뿐이고, 과학 자체가 신과 종교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이자 음모라고 말한다. 몇 번의 만남을 통해 타협점 없는 서로의 의견 차이를 확인한 두 사람은 얼마 후 각자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 기적에 가까운 현상을 함께 목격하게 된다.

영국 출판대상의 심사위원 샘 베이커는 이 소설에 대해 “흥미로운 제목, 뛰어난 이야기 솜씨, 탐나는 표지와 번뜩이는 홍보가 돋보인다”고 했다. 얼핏 남편 잃은 여인과 유부남의 사랑 이야기일까 싶지만, 작가 페리는 이런 시선을 단호히 부인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남자와 여자가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지고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그런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너무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더욱 복잡한 관계들이 있지 않나.”

한 언론 인터뷰에서 스스로 밝힌 바처럼 코라와 윌리엄은 소설에서 단순한 남녀 관계가 아닌, 서로 다른 이론과 믿음을 가진 채 서로의 세계를 넘나드는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경외감을 주는 자연 앞에서 남녀 사이의 감정은 얼마나 사사롭고 헛된가. 역사적 사실과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페리의 유려한 글 솜씨에 영국 독자들은 흠뻑 빠져 있다. 소설의 인기는 당분간 식지 않을 듯하다.
 
런던=안주현 통신원 jahn80@gmail.com

#세라 페리#에섹스의 뱀#the essex serp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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