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 자의 칼에 적극 맞서… 동아일보의 항거 두드러져”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일 03시 00분


일제강점기 신문 검열기사 소개 책 펴낸 한기형 성균관대 교수

검열로 지워진 신문 기사 일제의 검열로 6·10만세운동 기사와 사진이 지워진 채 발행된 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자(위쪽). 아래는 검열로 ‘국내동포에게 드림(4)’이라는 도산 안창호의 기고가 통째로 삭제된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자. 한기형 교수는 “검열은 ‘불온세력’이라는 용어나 ‘문화계 블랙리스트’란 모습으로 바뀌어 근래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검열로 지워진 신문 기사 일제의 검열로 6·10만세운동 기사와 사진이 지워진 채 발행된 동아일보 1926년 6월 11일자(위쪽). 아래는 검열로 ‘국내동포에게 드림(4)’이라는 도산 안창호의 기고가 통째로 삭제된 동아일보 1925년 1월 26일자. 한기형 교수는 “검열은 ‘불온세력’이라는 용어나 ‘문화계 블랙리스트’란 모습으로 바뀌어 근래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아일보DB
“언론, 집회에 대한 압박은 곧 사상에 대한 압박이요, … 미친 자의 손에 칼을 들림이 이 어찌 위험이 아니랴? 미친 자의 칼 아래서 항거가 어렵다 말라. 흐르는 피가 마침내 그 날을 꺾을 것이다.”(동아일보 1924년 6월 10일자 1면 사설 ‘항거와 효과’에서)

일제강점기 검열 관련 신문기사를 망라해 주석을 단 책 ‘미친 자의 칼 아래서 1, 2’(소명출판·한기형 엮음)가 최근 발간됐다. 책 제목은 일제 당국을 ‘미친 자’로 비판한 동아일보 사설에서 따왔다. 책에 수록된 7개 신문의 기사 2117건 중 동아일보가 절반(49.9%·1056건)을 차지한다.

지난달 29일 연구실에서 만난 한기형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교수(55·사진)는 “동아일보가 기사 삭제를 감수하면서 일제의 검열에 맞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려고 노력했다는 뜻”이라고 밝혔다.

“이게 6·10만세 다음 날 동아일보입니다. 어때요, 숨 막히는 긴장이 느껴지지 않나요?”

한 교수는 이날 1926년 6월 11일자 1면을 보여줬다. 머리기사 제목은 ‘각처에서 조선○○만세고창(高唱)’. ‘○○’라는 기호는 검열로 ‘독립’이라는 두 글자를 싣지 못하는 상황임이 전해진다. 제호 아래에는 ‘호외발행금지’라는 제목으로 “십일 국장 당일에 … 만세사건은 본보의 민활한 활동으로 호외를 발행하였으나 당국으로부터 인쇄까지 마친 호외의 반포를 금지함으로… ”라고 호외 압수 사실을 알렸다.

“왼쪽 기사는 지워졌고, 사진은 왼편이 알아볼 수 없게 비늘처럼 돼 있죠? 윤전기 앞에서 대기하던 일제 검열관이 인쇄판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조각칼로 쪼아낸 겁니다. 호외를 압수당하면 다시 발행하는 일을 되풀이해 호외를 세 번 내기도 했습니다.”(한 교수)

그는 언론 탄압에 항거하는 동아일보 영문 사설에도 주목했다. 1924년 7월 2일자는 ‘STRUGGLE FOR LIBERTY OF THE PRESS’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원문을 풀이하면 “조선인들은 한 몸이 되어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언론탄압에 저항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히 항의하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 이번 20일은 조선 전체의 시위일로 예정돼 있고…”라는 내용이다. 그해 11월 14일자는 제목부터 ‘CENSORSHIP’(검열)이었다. 한 교수는 “영문 기사에 상대적으로 날이 무뎠던 검열의 틈새를 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내동포에게 드림(4)―동아일보를 통하야’라는 도산 안창호의 기고(1925년 1월 26일자)는 검열로 통째로 삭제됐다. 빈 기사 자리 맨 끝에는 “이 논문은 사정에 의하여 계속치 못하나이다”라고만 쓰여 있다.

그러나 일제를 비판하는 예리한 만평이 살아남았다. 게다를 신고 기모노를 입은 일본인이 ‘제국주의’라는 가면을 들었고, 앞에 러시아 혁명가 레닌처럼 생긴 러시아인이 “아주 벗는 것이 어때?”라고 그를 조롱한다. 한 교수는 “‘일본은 제국주의면서 아닌 척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며 “검열관이 도산의 기고문을 자르다가 만평은 미처 못 봐 살아남은 듯하다”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독립군이 총격전을 벌였는데, ‘불온문서’가 발견됐다며 문서의 내용 자체를 전하는 기사도 적지 않다”며 “검열 속에서 보도하기 위한 기자들의 기지”라고 했다.

2002년경부터 검열을 연구한 그는 동아일보 등의 과거 기사가 디지털화하기 전까지는 신문 축쇄판과 마이크로필름을 한 장씩 수기로 옮겨 적으며 자료를 모았다. 박헌호(고려대) 정근식(서울대) 최경희(미국 시카고대) 한만수 교수(동국대) 등과 함께 ‘검열연구회’를 만들어 2011년 ‘식민지 검열: 제도·텍스트·실천’을 발간하기도 했다. 지금은 일제강점기 검열 전반을 다룬 저서를 모은 책을 준비하고 있다.

원래 한국 근대문학 연구자인 한 교수가 검열을 연구하는 이유는 뭘까. “식민지 시기 ‘왜 조선에서는 세계적인 걸작이 거의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에 부딪혔어요. 검열 탓이었습니다. 일제는 본국에서는 사후 검열을 하면서 조선이나 대만 같은 식민지에서는 사전 검열을 했습니다. 식민지가 독자적인 지식문화를 키울 수 없도록 만든 겁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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