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기단만 남은 순천왜성 천수각… 그날의 참상 기억하는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8일 03시 00분


잊혀진 전쟁 ‘정유재란’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로 이용한 순천왜성(노란 점선). 조명연합군의 거점지였던 검단산성은 사진 오른쪽 상단에 있다.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로 이용한 순천왜성(노란 점선). 조명연합군의 거점지였던 검단산성은 사진 오른쪽 상단에 있다. 순천=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기자는 지난달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에 위치한 왜교성(倭橋城·순천왜성)을 찾았다. 정유재란의 역사 현장을 살피기 위해 가장 먼저 방문한 곳이다. 1597년 12월에 축성된 왜교성은 일본군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군사 1만4000여 명을 이끌고 주둔한 성이다.

1597년 2월 일본의 관백(關白·일왕을 대리하여 정무를 총괄하는 직책)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그는 정치적 상황에 따라 성과 이름을 여러 차례 바꾸었음)는 명나라와 4년간에 걸친 강화협상이 깨지자 재침을 명령한다. 정유재란이다. 일본군은 대마도를 거쳐 부산포로 진입한 후 충청도 직산까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간다. 그러나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막혀 다시 순천, 울산, 사천 등지로 후퇴한다. 일본군은 남해안 일대의 전략 요충지에 왜성을 지은 후 장기 농성전에 들어간다. 정유재란의 중요 전투는 이들 왜성에서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특히 순천 왜교성이 정유재란의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크다. 사상 최초로 조명(朝明)연합 육군과 해군 4만2000여 명이 수륙병진(水陸竝進) 전략을 펼친 현장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한중일 삼국을 대표하는 용장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지금의 지형은 420년 전의 그때와 많이 변했다. 섬이었던 장도(獐島)는 흙으로 메워져 육지처럼 변했다. 그래도 왜교성에서 보면 당시의 수륙 전투 장면을 실감할 수 있다. 왜교성 앞 바다 쪽의 장도에는 이순신(李舜臣) 삼도수군통제사와 진린(陳璘) 도독의 조명연합 수군이 버티고 있었고, 왜교성 뒤 육지 쪽의 검단산성에서는 권율(權慄) 도원수와 유정(劉綎) 제독의 조명연합 육군이 막고 있었다.

고니시의 왜교성(면적 18만8000여 m²)은 당시 일본의 축성 수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그러나 이 성은 일본군이 세웠다는 이유로 복원 작업이 제대로 돼 있지 않다. 현재 성곽 외성(길이 2502m) 중 상당 부분이 훼손돼 있고, 왜교성을 상징하는 천수각(天守閣· 일본군 지휘부이자 망루대) 역시 기단(基壇) 일부만 남아 있다. 왜장 고니시가 머물렀던 천수각 기단에 올라 서 보았다. 장도와 검단산성이 눈앞에 펼쳐졌다.

왜성 위의 고니시: “구리스토님! 살려주소서”

기단만 남아 있는 순천왜성의 천수각. 왜장 고니시가 머물렀던 곳이다. 순천=박영철 기자
기단만 남아 있는 순천왜성의 천수각. 왜장 고니시가 머물렀던 곳이다. 순천=박영철 기자
1598년 음력 9월 15일, 순천 왜교성의 천수각. 밤이 되면서 바람도 없다. 가을 하늘에 뜬 보름달은 여느 때보다 더 둥글고 커 보였다. 철썩철썩 뜸을 들이며 성벽 아래를 때리는 파도 소리는 달빛과 어울려 묘한 운치를 자아냈다. 그러나 폭풍전야의 평화로움이다.

“아름다운 성이다. 무식한 칼잡이 놈이 지은 성보다 백번 낫다. 그렇지 않은가, 아리마!”

고니시가 만족한 표정으로 물었다. 옆에 서 있던 심복 아리마 하리노부(有馬晴信)가 “하이(예)” 하고 짧게 대답했다. 고니시는 울산성(울산왜성)을 짓고 주둔 중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무식한 칼잡이’라고 불렀고, 가토는 그런 고니시를 ‘미천한 장사꾼 아들’이라고 비아냥거렸다. 둘의 갈등은 전쟁의 양상을 바꿔놓을 정도로 심했다. 그걸 잘 아는 심복은 주군의 말씀이 무조건 옳다고 동의했다.

고니시가 조선인 노역자들을 강제 동원해 3개월 만에 완성한 왜교성은 천혜를 이용한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3면이 바다에 접하고 유일하게 서북쪽만 뭍으로 이어진 지형을 섬처럼 만들었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성 전체를 완벽하게 보호하는 해자(垓字)로 이용한 것이다. 동쪽 바닷가에는 500여 척의 전선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선창까지 두었다.

왜군이 호남 지역에 지은 첫 성인 왜교성은 히데요시가 직접 명령한 결과다. 히데요시는 ‘분로쿠의 역(文祿の役·임진왜란의 일본식 표현)’에서 조선의 곡창지대인 호남을 장악하지 못한 점을 주요 패인 중 하나로 꼽았다. 그래서 ‘게이초의 역(慶長の役·정유재란의 일본식 표현)’을 지시하면서 ‘전라도를 반드시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호남을 공략하는 전초기지가 왜교성인 것이다. 고니시는 자신의 건축 감각에 다시 한 번 뿌듯함을 느꼈다. 그것도 잠시.

“이순신이 움직였다고?”

5층으로 꾸며진 천수각 꼭대기에서 바다 냄새를 음미하던 고니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매사에 빈틈이 없는 아리마는 “척병의 정보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이 수군을 이끌고 완도의 고금도에서 동쪽의 왜교성으로 이동한다는 것이었다. 육로로는 조명연합군이 남원을 거쳐 이미 순천 부유창까지 들어와 길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순신에 의해 바닷길마저 막혀 버리면 왜교성의 일본군은 그야말로 고립무원 신세였다.

“수륙병진(水陸竝進)이구나. 승산 없는 싸움이다.”

고니시는 항구도시인 사카이(堺)에서 무역상의 아들로 성장했다. 상인의 아들답게 계산이 빨랐다. 이길 수 없는 싸움에서 자신과 부하들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다.

“다윗의 자손 구리스토(예수)님과 성모 마리아님께 기도를 드려야겠다.”

고니시는 어릴 적 포르투갈 출신 예수회 선교사로부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을 받고 기리시단(吉利支丹·크리스천)이 되었다. 규슈 히노에번(日野江藩)의 다이묘(大名·영주)이기도 한 아리마 역시 ‘돈 프로타지오’라는 세례명을 받은 기리시단이었다. 침실로 돌아온 고니시는 십자 성호를 그었다.

“주의 종 아우구스티노와 저의 부하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가게 해주시기를!”

기도를 마친 고니시는 지난날을 곱씹어 보았다. 6년 전인 임진년 4월 주군(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조선을 침공할 때는 명으로 쳐들어가기 위해 조선의 길을 빌려달라는 가도입명(假道入明)이라는 명분이나마 있었다. 고니시 개인적으로는 이교도(異敎徒)의 나라를 개종시키기 위해 성전(聖戰)을 치른다는 나름의 사명감도 가지고 있었다. 십자군들이 이교도인 이슬람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고결한 전쟁’을 치렀듯이….

“우리는 성전을 치르는 군인이다!”

고니시의 군선에는 X자 모양의 군기(軍旗)가 펄럭였다. 원래는 붉은 바탕에 흰색 십자가 모양의 깃발을 사용했으나 히데요시가 크리스천 금교령을 내리자 십자가를 X자 모양으로 변형시켜 눈가림한 것이다. 휘하인 아리마의 군선에는 십자가 모양 깃발이 펄럭였고 부대원들도 규슈 출신의 기리시단이 대부분이었다.

그리나 이번 ‘게이초의 역’에서는 아예 명분 따위를 찾을 수 없었다. 호남인들의 씨를 말리라는 관백의 지침이 유일한 명분이랄까. 의미도, 승산도 없는 전쟁! 하루속히 왜교성을 탈출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었다. 1598년 9월의 보름달은 고니시에게 깊은 시름을 안겨주고 있었다.
 

▼왜교성∼나로도∼고금도, 이순신의 ‘백리길 복수극’ 해상루트▼

바다의 이순신: “반드시 책임을 물으리라”

정유재란에 참여한 명나라 종군화가가 왜교성 전투 장면 등을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저본으로 19세기에 그린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정유재란에 참여한 명나라 종군화가가 왜교성 전투 장면 등을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을 저본으로 19세기에 그린 정왜기공도병(征倭紀功圖屛).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자는 왜교성 천수각에서 위성지도를 펼쳐 보았다. 왜교성에서 당시 이순신이 주둔하고 있던 고금도 진영까지 이어지는 바닷길이 보였다. 왜교성에서 여수를 거쳐 중간 지점의 고흥 나로도를 지나 바로 서쪽의 고금도로 연결되는 100리 길 해상루트였다. 당시 군선들은 노(櫓)와 범(帆)으로 항해했으니, 수군이 이동하는 데 최소 사나흘은 걸릴 거리였다.

고니시가 고민에 빠진 바로 그날 아침, 이순신은 실제로 고금도에서 진영을 옮기고 있었다. ‘난중일기’를 토대로 그의 행보를 추적해보자.

9월 15일 오전. 고금도의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출항에 좋은 날이었다. 이순신은 명나라 진린의 수군과 함께 왜교성에서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이른 아침, 이순신은 대장선으로 향했다. 조선 수군도 어느 정도 재건된 상태였다. 고금도에서 전선 40여 척을 새로 건조했고, 군사 8000여 명과 군량미 1만여 석도 확보했다.

그러나 그의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오랜 진중 생활로 53세의 나이에 이미 머리와 수염이 허옇게 세버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못 알아볼 정도로 이순신의 얼굴은 늙었다. 임금의 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투옥과 고문으로 망가진 몸은 통제사로 복귀한 이후에도 좀체 회복되지 않았다.

고니시 군과의 일전을 앞두고서 이순신 역시 고뇌가 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순신은 이번이 마지막 전쟁이 될 것임을 직감으로 느끼고 있었다. 배를 타기 전 새벽에 일찍 일어나 척자점(擲字占)을 쳐본 결과에 마음이 쓰였다. 이순신은 일(一)에서 사(四)까지의 숫자가 4면에 차례대로 새겨진 윤목(輪木)을 던져 괘(卦)를 뽑는 방식으로 길흉을 점쳤다. 첫 번째는 여궁득전(如弓得箭·활이 화살을 얻는 것과 같음)의 괘를 얻었다. 이어 재점(再占)에서는 여착장어(如捉長魚·큰 물고기가 잡힌 것과 같음)의 괘를 얻었다.

‘첫 번째 괘는 길(吉)하다. 이전 전투에서도 이 괘가 나와 좋은 결과를 보지 않았던가. 그러나 두 번째 괘는 흉(凶)하다. 적군을 무찌르는 게 길이라면 흉은 무엇인가? 그게 혹 나에 해당하는 것인가….’

이순신은 중요한 전투를 앞두거나 날씨, 가족의 안위 등이 궁금할 때는 척자점을 쳐보곤 했다(‘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14차례 직접 점을 친 기록이 나온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전쟁판에서 조선의 관료와 장수들은 종종 주역점이나 척자점으로 길흉을 예측하곤 했다.

“적군을 이길 수만 있다면 흉이 나에게 온들 무슨 대수랴.”

이순신은 단단히 마음먹었다. 중간 기착지인 나로도로 가는 대장선 위에 올랐다. 소나무와 참나무로 건조된 판옥선들이 격군(노꾼)들의 우렁한 소리에 맞추어 이순신을 따랐다. 선상에 서니 만감이 교차했다. 백의종군하던 작년(1597년) 4월에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땅을 치며 통곡했다. 여수 고음천에 있던 팔순의 어머니가 아들이 옥에서 나와 백의종군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병든 몸을 이끌고 아산으로 오던 중에 배에서 숨을 거둔 것이다. 10월에는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 면을 왜병의 칼에 잃었다. 면이 나타나 원수를 갚아달라고 하는 꿈을 꾸고 나면(이순신의 ‘행록·行錄’)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조선인들을 도륙한 왜적들을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반드시 책임을 물으리라.”

1598년 9월 보름의 순천 앞바다는 온갖 분탕질을 쳐놓고 내빼려는 자와 반드시 책임을 묻겠다는 자의 대립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육지의 유정: “꼭 싸워서 이겨야만 하나”

임진왜란 이후 조선을 제쳐두고 일방적으로 일본과 강화 협상을 하다가 깨지자, ‘천자의 나라’ 대명제국(大明帝國)도 자존심이 상했다. 왜군이 조선을 재침공하자, 명의 황제 신종(神宗)은 1597년 2월 즉시 재파병을 결정했다. 그리고 끝장을 보기 위해 1598년 7월 대공세를 펼치게 된다.

명군(明軍)의 경략(經略·지휘자) 형개(邢개)는 조선군과 합동해 사로병진(四路竝進)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동로군, 서로군, 중로군, 수로군의 4개 방면으로 군대를 나눠 각지의 일본군을 동시에 공격해 쓸어버리는 전략이었다.

이 중 서로군이 왜교성의 고니시를 맡기로 했다. 서로군 제독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전라병사 이광악 등이 이끄는 1만여 명의 조선군을 포함해 2만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유정은 남의 나라 전쟁에 서두를 이유가 없다는 듯 뭉기적거렸다.

이순신이 고니시와 결전을 준비하던 즈음인 1598년 9월 초, 유정은 왜교성으로 진군해 순천부까지 도착했다. 거기서 일본 측 밀사를 통해 고니시와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유정과 동행한 우의정 이덕형은 그가 고니시와 강화 협상을 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해 선조에게 보고했다. “그의 마음이 의심스러우니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선조실록’)

유정은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고 오히려 역정을 냈다. 3개월 내에 적을 무찌르지 않으면 스스로 목을 베어 황상(중국 황제)께 바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서둘지 마라. 내게 계책이 있다.”

유정은 애초 고니시와 만나는 척 유인해 사로잡을 생각이었다. 휘하 장수들이 무모한 계획이라고 말려도 끝까지 우겼다. 그에겐 다른 속셈도 있었다. 고니시를 못 잡더라도 그가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유정 외에 달리 손을 내밀 사람이 없었다. 고니시가 살려달라고 하면 적당히 봐줄 요량이었다.

‘일본군만 철수하면 목적은 달성되는 것 아닌가. 피 흘리지 않고 성공하면 그게 지장(智將)이지.’

유정은 잇속 계산을 마친 뒤, 군막 안에서 중국 요양(遼陽)에서 데려온 기생과 술판을 벌이며 노닥거렸다. 유정의 부하들조차 군중에 여인을 데리고 온 유정의 행태에 분개했다. 유정은 9월 보름을 넘기고서야 왜교성에 얼굴을 비쳤다. 유정은 이후 전투를 시늉으로 치르거나, 일본군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퇴로를 열어주는 행태로 일관했다. 유정 군의 행보는 번번이 조선 육군과 이순신 수군의 발목을 잡게 된다. 왜교성 전투에 명군의 수군 책임자로 참여한 진린마저 유정의 군막을 찾아가 수자기(帥字旗)를 찢어버리며 거칠게 항의할 정도였다.

사실 유정의 행태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조선에 파병된 명군 장수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명군 지휘부는 자국 군사의 희생을 최소화하면서 패색이 짙어가는 일본군이 스스로 조선에서 물러나기를 원했다. 양전음화(陽戰陰和)! 겉으로는 전쟁을 하고 뒤로는 협상하는 태도를 줄곧 유지했다.

세 나라 장수들의 동상이몽 속에서 왜교성 전투가 다가왔다. 1598년 9월 말에서 11월까지 이어진 이 전투에는 한중일 삼국 병사들뿐만 아니라 신출귀몰해 귀병(鬼兵)이라고 불리는 묘족(苗族)을 비롯해 섬라(暹羅·태국), 도만(都蠻·티베트), 능국(楞國·스리랑카), 면국(緬國·미얀마) 등 범(汎)아시아 출신의 병사들이 중국 장수의 사병(私兵)으로 참전했다. 16세기 세계 최대의 국제대전이었던 것이다.

순천·완도=안영배 전문기자 ojong@donga.com
 

※이 시리즈는 사료와 문헌, 전문가 고증 등에 근거해 당시 상황을 소설식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정유재란#순천왜성#천수각#이순신#고니시 유키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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