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초기지로 쌓았던 정유재란 당시 일본왜성
장악 지역 실질 지배 위한 성격 강해… 입성이후 조선백성 유인책 쓰기도
왜성은 임진왜란(1592∼1596년)과 정유재란(1597∼1598년) 중 경상도와 전라도의 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총 28개(시기가 불분명한 왜성 제외)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군은 부산포에서 웅천 사이의 20개 지역에 1차로 왜성을 쌓았다. 주로 해안지역에 산재한 이 성들은 일본 본토와 통하는 해상로를 확보하는 한편 조선 수군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정유재란 시기, 일본군은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8개 지역에 2차로 왜성을 쌓았다. 울산왜성, 사천왜성, 순천왜성(왜교성) 등 대표적인 왜성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지어졌다.
이때 지은 왜성들은 성벽, 성터 등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데, 일본의 성 구조와 매우 유사해 연구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일본 성은 대체로 천수각이 있는 내성(內城)을 혼마루(本丸)라 하여 주로 지휘부가 머물렀다. 내성을 감싸는 외성(外城)은 니노마루, 산노마루라 하여 바깥 방향으로 겹으로 축성해 나갔다. 대체로 하나의 성벽만 갖춘 조선 성에 반해 일본 성들은 이중삼중의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조명연합군이 공격하는 데 애를 먹었다.
또 정유재란 시기의 왜성들은 장악한 지역을 영구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거점 기지 성격이 강했다.
실제로 고니시는 왜교성에 입성한 후 산으로 도망간 조선 백성들을 유인해 안전을 보장하는 민패(民牌)를 주고 쌀도 나누어 주었다. 또 일본군이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단속하기도 했다. 이렇게 백성들을 회유하니 투항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난중잡록’). 고니시는 점령지에서 실질적인 통치 행위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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