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연극 ‘1945’
국립극단과 내놓은 6년 만의 신작, 탄탄한 이야기와 배우 연기 돋보여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관객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극작가 배삼식 특유의 능력이 또 한번 발휘됐다. 연극 ‘1945’ 이야기다. 장민호 백성희 선생의 유작인 ‘3월의 눈’ 이후 배 작가가 국립극단과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극의 배경은 1945년 광복 직후 만주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갈 기차를 기다리는 조선인들이 전재민(戰災民) 구제소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억척스럽고 강한 성격의 위안부 여성 명숙, 명숙에게 자신도 조선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조르는 일본인 동료 미즈코, 어린 남매 숙이와 철이를 둔 김순남 백익남 부부…. 총 15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인물들이 구제소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식구처럼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담았다.
잔잔하게 흘러가던 이야기는 명숙의 벙어리 동생으로 신분을 감췄던 미즈코의 정체가 드러나며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수십 년간 조선인과 일본인의 경계를 오가며 살아온 인물들은 광복과 동시에 완연한 조선인으로 정체성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그 정체성에 맞지 않는 것들은 병적으로 배제하기 시작한다. ‘일본인’ ‘일본에 부역한 배신자’ ‘위안부 출신 조선 여성’ 등 일본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된 사람이라면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악’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1945년 조선 민초들의 삶이었고, 조선 사람의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작품은 역사와 국가관을 강요하기보단 잔잔한 사람 이야기로 관객들의 마음에 파동을 일으킨다.
러닝타임은 무려 2시간 40분이다. 황량한 벌판을 표현한 무대는 단조롭고 비어있다. 눈을 휘어잡을 화려한 소품은 없지만 관객의 집중력은 떨어지지 않는다. 잔재주보다 탄탄한 기본을 택한 수작이기 때문이다. 일단 대본의 얼개가 지루할 틈 없이 촘촘하다. 김정민 주인영 김정은 박윤희 등 실력파 배우들이 한데 뭉쳐 각기 다른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는다. 주·조연 배우의 실력차를 가늠하기 어려운 작품은 오랜만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