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초반의 나이에 미국 뉴욕의 요리학교를 졸업하고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2년간 요리사로 일한 적이 있다. 매일 200여 명의 손님을 받으며 14시간 넘게 온종일 서서 끝이 보이지 않는 중노동에 시달리는 생활이었다. 긴 노동만큼이나 힘들었던 것은 식당의 남는 재료로 만든 형편없는 ‘패밀리 밀(family meal·식당 오픈 전에 요리사와 직원들이 먹는 식사)’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었다. 상한 것은 아니지만 시들어 빠진 채소 쪼가리를 섞어놓은 것을 드레싱도 없이 우걱우걱 씹어 넘기고 불어 터진 파스타로 배를 채우는 건 고역이었다.
그렇게 몇 달을 지내던 어느 날 일본인 동료가 일본인이 만드는 도시락 배달업체를 알게 됐다며 정기적으로 시켜 먹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불어 터진 파스타보다 못할 것이 뭐 있으랴 싶어 내용물이 무엇인지 묻지도 않고 당장 “그럴게”라고 했다.
10달러 남짓한 가격에 쌀밥과 가라아게(일본식 닭튀김)나 생선조림이 메인으로 나오고, 통깨에 버무린 시금치나 간장양념에 조린 단호박, 채소절임(쓰케모노)이 반찬으로 곁들여진 일본식 백반정식이었다. 가끔 튀김(덴돈)이나 쇠고기볶음(규돈), 간장양념에 익힌 닭과 달걀을 올린 덮밥(오야코돈) 또는 일본식 카레가 나오는 날도 있었다.
소박한 요리들이었지만 쌀밥을 씹어 넘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지쳤던 위장이 평안을 찾았다. 도시락이 처음 배달되던 날, 같이 먹던 일본 친구 도모미가 뜨거운 물에 푼 인스턴트 미소시루를 삼키며 했던 첫 마디가 기억난다.
“홋토스루(ほっとする·직역하면 ‘한숨 돌렸다’, ‘안심된다’는 뜻).” 그래서 “너도 된장국을 들이켜야 속이 풀리느냐”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격렬하게 여러 차례 끄덕였다. 나도 자박하게 끓인 된장에 보리밥 쓱쓱 비벼 김치 한쪽 올려 먹으면 속이 풀리는데….
그렇게 2년간 그녀와 쌀밥을 먹고 된장국을 마시며 가까워졌다. 힘든 노동을 서로 도우며 친구가 됐다. 30여 년간 다른 땅에서 살아온 두 사람에게 ‘밥심’으로 견디는 공통된 DNA가 존재하는 것이다.
밥, 된장, 반찬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은 우리와 음식문화의 궤를 같이하고 있다. 콩의 원산지인 만주와 한반도를 통해 전달된 장(醬)과 쌀을 주식으로 하는 농경문화가 그 바탕이다. 피자니 스테이크니 뭐니 해도, ‘B급 구루메’(저렴한 가격으로 길거리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음식을 일컫는 일본의 신조어)의 메카 서울 홍익대 부근에서 꾸준히 손님을 끄는 곳은 일본 가정요리를 만드는 식당들이다. 매일 먹는 밥이 질릴 때, 그렇지만 또 밥을 포기할 수 없을 때 이만한 대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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