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8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초청으로 한국 땅을 처음 밟은 호주의 한 여대생은 당황스러웠다. 김포공항에 마중 나오기로 한 학생들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초청 측이었던 연맹 소속 간부들이 임수경의 방북 사건으로 인해 공안당국으로부터 수배를 받아 모두 잠적해버린 것. 당시 대학생이었던 루스 배러클러프 호주국립대 문화역사언어학부 교수(46)는 “나도 모르게 한국 민주화 역사 속에 들어왔다는 묘한 느낌이 들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며칠이 지나서야 초청했던 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다. 힘들게 시작된 인연 덕분이었을까. 이후 한국과 길고 깊은 관계가 이어졌다. 서울의 대학가와 전남의 농촌 마을 그리고 경기 부천시의 공단 등을 직접 돌아다니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진행한 한국의 민낯을 마주했다. 특히 그녀가 주목한 것은 또래의 여공(女工)들이었다.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하면서 한국의 또래 친구들이 만들었을 신발을 신고 다녔죠. 저와 비슷하게 책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끌림을 느꼈습니다.”
호주로 돌아간 후 그녀는 한국의 여공들이 직접 쓰거나 주인공이 된 문학 작품을 연구했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의 소설과 신문 기사, 1980년대 여공들이 작성한 수기, 1990년대 신경숙의 소설 ‘외딴방’까지 여공과 관련한 각종 자료를 샅샅이 살폈다. 2012년 호주에서 이 같은 연구 성과를 묶어 책으로 냈고, 최근 한국어로 번역한 ‘여공문학’을 출간했다.
사실 여공과 산업화시대를 소재로 한 문학은 세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장르다. 하지만 배러클러프 교수는 한국만의 독특한 여공 문화에 주목해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은 군사문화와 결합된 독특한 산업화 과정을 겪었어요. 덕분에 수많은 산업 영웅이 등장했고, 그 뒤에선 여공처럼 묵묵히 헌신한 이들이 있었죠. 어려운 환경에서도 여공들은 야학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고, 성장하려는 특별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녀는 소설뿐 아니라 신문 기사를 통해 당시의 한국 사회를 오롯이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다. “1920∼30년대 여성 인권, 노동권 등 근대화에 대한 고민이 가장 많았던 곳은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이었어요. 동아일보에서 1934년부터 연재한 강경애의 소설 ‘인간문제’는 한국 여공문학 작품의 선구자이자 백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장을 향하던 여성들은 서비스업 등으로 형태가 바뀐 노동을 하고 있다. 배러클러프 교수는 과거 여공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기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현충일 기념사에서 참전용사에 대한 감사함뿐 아니라 청계천 여공의 공헌에 대해서도 언급한 사실을 보면서 여공의 가치가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어요. 이들의 아픔뿐 아니라 성취와 기쁨에 대해서도 한국 사회가 계속해서 기억하고 이어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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