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는 창간 후 발행한 호수(號數)를 이르는 지령(紙齡·신문의 연령)이 붙어 있다. 예를 들어 2017년 7월 22일자 동아일보는 ‘2만9842호’다. 지금처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이 지령을 벗어나 신문을 발행하는 일이 잦았는데 그게 바로 ‘호외(號外)’다.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97년 전 오늘(1920년 7월 22일) 100호를 맞았다. 100단위 숫자를 기념하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이날 신문 1면 가운데에는 일본 도쿄(東京)에 주문했던 윤전기(신문을 인쇄하는 기계)가 도착한 걸 자축하고, 지면 일부를 독자 참여 꼭지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자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결국 이날 신문은 세상에 나가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1면 머리기사로 나간 사설 ‘학우회 순연강연회 해산령과 언론 압박’에 문제가 있다며 발매반포금지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조선총독부에서 문제 삼은 부분을 삭제하고 호외로 발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학우회’는 도쿄에 유학 중이던 조선 청년 18명이 만든 단체다. 이들은 여름방학을 이용해 1920년 7월 9일 부산 동래를 시작으로 조선 각지를 돌며 순회강연을 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들이 도쿄에서 출발할 때부터 소식을 전하는 등 이 강연을 적극 후원했다.
학우회는 부산을 시작으로 울산 김해 대구 통영 공주 청주 천안 등을 거쳐 그달 18일 서울 단성사에 도착했다. 이 자리에는 3000여 명이 모였다. 나중에 초대 재무장관이 되는 게이오(慶應)대 유학생 김도연(1894~1968)이 ‘조선 산업의 장려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시작하자 강연장은 조선총독부 성토대회장으로 바뀌었다. 결국 종로경찰서장이 강연을 중단시키고 해산을 명했다. 조선총독부는 학우회가 서울 이북에서 열려던 강연회도 모두 취소시켰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100호 기념호 1면 사설에 “무차별이니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선정덕정(善政德政)이니 하는 사(蛇·뱀)의 설(舌·혀)을 농(弄)하야 조선인을 기만치 말라”고 조선총독부를 규탄했다. 이날 신문이 발매반포금지 조치를 당한 이유다.
새로운 지식에 굶주렸던 당시 동포들은 과학 교육 여성 위생 등 다양한 주제로 열리는 강연회에 참석해 지적 허기를 달랬다. 동아일보는 이 강연회를 지상 중계하면서 지식 보급에 앞장섰다. 1920년 4월부터 1925년 말까지 약 5년 동안 동아일보에서 소개한 강연회 기사는 총 2097건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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