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잡史]시신 수습 실적따라 관직 제수 받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4일 03시 00분


버려진 백성 임종 도와준 ‘매골승’

매골승이 주인공인 한문소설 ‘강도몽유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매골승이 주인공인 한문소설 ‘강도몽유록’.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선조 27년(1594년), 굶주린 백성이 대낮에 서로 잡아먹고 역병까지 겹쳐 죽은 자가 이어졌다. 수구문 밖에 그 시체를 쌓으니 성보다 높았다. 승려들을 모집하여 그들을 매장하니 이듬해에 끝났다.”(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조선시대에는 전쟁이나 기근으로 길에서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바라보기조차 힘든 광경 속에서 죽은 백성들을 수습해 주는 역할을 매골승(埋骨僧)이 맡았다.

고려시대 승려는 종교인이자 의술 천문 풍수 등 다양한 지식과 기술을 보유한 전문인이었다. 병자들이 치료를 위해 의술이 뛰어난 승려를 찾기도 했다. 속세와 떨어진 사찰은 병자의 치료와 요양에 적합한 곳이었다. 죽음을 맞게 되더라도 극락왕생을 빌며 임종할 수 있었다.

매골승은 불교식 장례인 화장(火葬)을 주관했고, 풍수에 맞게 묏자리를 잡아주었다. 묘를 어떻게 쓰는가에 후손의 번성이 달려 있다고 믿었던 당시 사정으로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을 담당한 셈이다. 고려 말 요승(妖僧)으로 알려진 신돈도 원래는 매골승이었다.

조선에서 매골승은 활인원(活人院) 소속의 관원이었다. 활인원은 동대문 밖과 서소문 밖 두 곳에 있었는데, 사람을 살린다는 취지로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쳤다. 그중 매골승은 도성과 근방을 돌아다니며 버려진 시체를 수습했다. 매골승은 나라에서 매월 곡식과 소금 등을 받았고, 봄·가을에는 면포 한 필을 받았다. 또 실적에 따라 관직을 제수받는 기회를 얻었다.

매골승의 업무는 기근과 역병, 전쟁이 일어날 때 급증했다. 이들은 십중팔구 병을 앓았으니, 역병도 창궐했던 것이다.

세종 9년(1427년) 기근으로 죽어나가는 사람이 늘자 10명이었던 매골승을 16명으로 늘렸다. 그럼에도 업무가 과중하여 이듬해 다시 4명을 더 두었다. 수십만 명에서 100만여 명이 희생됐다는 경신대기근(1670∼1671년) 때는 더욱 참혹했다. 가뭄, 냉해, 홍수, 역병이 잇달았다. 백성들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한 참상이 벌어졌다며 탄식했다. 그렇게 쌓여간 수많은 시체 역시 매골승을 비롯한 승려를 동원해 매장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승려 200명이 주인이 없는 시체 6969구를 매장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사람이 30구 이상을 수습했으니 노고가 어떠했을지 상상하기 어렵다.

병자호란 뒤 나온 한문소설 ‘강도몽유록(江都夢遊錄)’은 매골승 청허 선사가 주인공이다. 청허 선사가 청나라 군대가 죽인 강화도 백성들의 시신을 수습했고, 꿈에서 귀신이 된 여인들이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걸 들었다는 내용이다.

조선 후기에는 민간의 장례를 향도계(香徒契)라는 조합이 맡게 된다. 하지만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경우라면 어김없이 승려들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없기를 바라는 부처, 매골승은 그 현신(現身)이 아니었을까.
 
김동건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수료
#매골승#조선 활인원#강도몽유록#매골승 청허 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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