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란 인정세태(人情世態)에 천착하는 회화, 더 넓은 의미에서 웃음을 통해 표현하는 ‘인생 비판’의 회화다.”
사뭇 비장한 느낌을 주는 만화에 대한 정의다. 이 말은 동아일보에서 만화 담당 편집기자로 활동했던 최영수 기자(1911∼?)가 1933년 신동아 6월호에서 밝힌 만화론이다. 그는 ‘복남의 탐험기’(1932년) ‘전억망’(1933년) ‘얼간선생’(1935년) 등 일제강점기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던 시사 만화가다.
23일 제20회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가 열린 경기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만난 서은영 백석대 외래교수(41·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포럼위원)는 “구한말과 일제 초기 만화를 그렸던 이들이 ‘기자’ 혹은 ‘화가’를 자처한 것과 달리 최영수 기자는 스스로를 ‘만화가’로 규정하고, 만화관을 밝힌 글을 쓴 국내 최초의 만화이론가”라고 밝혔다.
서 교수는 축제 기간 중 열린 콘퍼런스에서 최 기자를 분석한 ‘1930년대 기자-만화가의 한 양상’이란 연구 논문을 발표했다. 서 교수는 2013년 발표한 박사학위 논문에서 우리나라 첫 신문 아동 연재만화가 1926년 동아일보의 ‘뺑덕이와 섭섭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만화연구가다.
사실 우리나라의 근현대 만화는 1909년 대한민보에 실린 이도영의 삽화를 시작으로 1920년대 4컷 만화로 인기를 끈 노수현의 ‘멍텅구리’까지, 최 기자가 활동하기 전에도 이미 인기를 끌고 있었다. 하지만 서 교수는 “당시 단순한 웃음을 전달하는 유머러스한 내용 위주였던 다른 만화가들과 달리 최 기자의 만화에는 다양한 사회비판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며 “식민지 조선의 슬픔, 삶의 비애 등을 반영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독특한 만화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실제 최 기자의 만화엔 유독 쓸쓸한 주인공들이 자주 등장한다. 경성의 취업난을 보며 자조하는 지식인, 복권 등 일확천금의 환상에 빠져 있는 대중처럼 말이다. 당시로선 보기 드물던 여성 캐릭터인 하녀가 등장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최 기자는 당시의 만화가 외국 스타일을 따라하거나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하는 부분에 불만을 갖고 있었다”며 “이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풍자를 자주 썼다”고 분석했다.
최 기자는 1931년 동아일보에 입사한 후 이듬해인 1932년부터 동아일보와 신동아의 신가정(현 여성동아) 담당 편집자로 활동했다.
서 교수에 따르면 최 기자는 요즘의 기준으로 볼 때 ‘비주얼 저널리즘’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1928년부터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동양화를 공부했다. 그가 유학했던 1920년대 후반 일본에는 아사히신문 등에서 이미 만화 등을 활용한 이미지 중심의 저널리즘이 본격화하던 때였다. 그는 1948년 ‘나의 만화생활 자서’라는 글을 썼다. 최 기자는 당시 “동경(도쿄) 유학 중 신문배달을 하면서 저널리즘에 있어서 회화의 중요성을 느꼈다. 3년 만에 귀국하면서 신문에 스케치를 위주로 한 기행 단문(短文)을 발표해 새로운 감각적인 형태를 시도했다”고 밝혔다.
서 교수는 “최 기자는 기존의 긴 글 위주의 고정 틀에 박힌 신문을 지양해야 한다고 생각한 앞선 감각의 언론인”이라며 “그림과 만화의 중요성을 강조한 덕분에 동아일보가 여성과 아이들로까지 신문 독자층을 넓힐 수 있었고, 최고의 인기를 얻는 신문이 됐다”고 말했다.
최 기자는 광복 후까지 언론인이자 수필가,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유머소설가, 영화제작자로도 활동했다. 그러나 1950년 7월 6·25전쟁 중 납북돼 끌려가던 중 해주에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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