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잡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전화가입자와 자동차 소유자 230여만 명을 조사해 앨프레드 랜던 후보가 당선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조지 갤럽은 전화번호부 등에서 빠진 하층민까지 두루 포함시킨 1500명을 면접 조사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의 당선을 내다봤다. 대선 결과는 200만 명이 넘는 리터러리 다이제스트가 아니라 1500명을 조사한 갤럽이 맞혔다. 갤럽이 추출한 표본이 모집단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갤럽은 대학 때부터 과학적 여론조사에 대한 고민을 해왔다. 1932년 장모인 올라 배브콕 밀러가 출마한 아이오와 부주지사 선거에서 유권자들이 원하는 것을 조사했고 이를 선거운동에 활용했다. 누구도 승리를 점치지 않았던 밀러는 예상을 뒤엎고 압승했다.
1936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당선된 결과는 ‘갤럽’이라는 이름이 여론조사를 대표하는 계기가 됐다. 그의 과학적인 조사에는 정부가 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다.
갤럽은 선거뿐 아니라 마케팅에도 여론조사를 활용하면서 활동영역을 넓혔다. 1948년 대선 당시에는 해리 트루먼 후보의 승리를 예측하지 못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결과 하나를 제외하곤 1980년대까지 11차례의 대선 결과를 정확하게 맞췄다.
갤럽이 설립한 미국여론연구소가 모태가 된 ‘갤럽인터내셔널’에 각국의 조사기관이 회원으로 참여해 다양한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1984년 7월 26일 갤럽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이름은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계속 등장한다. 그해 7월 31일자 동아일보 ‘횡설수설’ 칼럼에선 ‘갤럽의 타계를 놓고 민주주의와 여론의 무게를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양자는 그만큼 깊은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지금도 유효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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