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동아/7월 30일]코드인사 시작은 이승만 때부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30일 15시 17분


제일 쉬운 문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은?

잘 아시는 것처럼 이승만(1876~1965)이다.



조금 어려운 문제. 그럼 첫 국무총리는?

이번에는 광복군 참모장 출신인 이범석(1900~1972) 장군이 정답이다.



이제 제일 어려운 문제.

그럼 첫 번째 국무총리 후보자는 누구였을까.

이윤영 목사(1890~1975)가 주인공이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역사상 첫번째 국무총리 후보자는 인준 투표를 통과하지 못했다.

황해도에서 태어나 감리교 학교에서 공부한 이 대통령은 평안도 출신 감리교 목사인 이 목사를 1948년 7월 27일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남북통일을 위한 인선’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 목사 카드를 꺼내든 게 불안했는지 국회에 나와 직접 대통령 교서(敎書)를 읽었다.

이 대통령은 이 교서에서 “모든 추천 명단이나 신문에 발표되는 것을 보면 가장 국무총리에 어울리는 분은 인촌 김성수(1891~1955) 신익희(1892~1956) 조소앙(1887~1958) 씨 등 세 분”이라고 밝혔다.

왼쪽부터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왼쪽부터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그러면서 △김성수는 “국무총리보다 덜 중요하지 않은 책임”을 맡겨야 하는 사람이라서 △신익희는 국회 부의장으로 이 대통령 본인이 대통령이 되면서 공석이 된 국회의장을 대신해 국회를 이끌어야 해서 △조소앙은 “불행히도 근자(近者)에 와서 총선거문제 이후로 노선이 갈려서” 총리로 지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목사 인준인은 찬성 59표, 반대 132표로 부결됐다.



그러자 동아일보는 7월 30일 사설 ‘민중의 정치를 고조(高調)함’을 통해 “(이 대통령이 ‘이외의 인물’을 총리로 지명하겠다고 밝힌 데 대해) 총리의 인선은 반드시 국민적 기초 위에서 되어야 할 것이 상식이매, 이 상식을 이탈한 비밀과 의외가 있을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의 과도한 비밀은 드디어 이외의 파문을 초래하였으니 이윤영 씨의 인준 부결 소동은 이 땅, 이 겨레의 헌정사상 첫 페이지의 일대오점으로 국민의 통한이 이에 더 할 바 없다”고 비판했다. “대통령의 판단을 오도(誤導)하는 측근의 잡음을 의아(疑訝·의심)할 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 사설은 “이 대통령은 본인의 의사(意思)만이 민족의 원한 바라고 단정한다”며 “만약 일개인의 의사가 민의를 반영하는 것이라면 이 나라는 영웅이나 천재가 움직이는 나라요 민주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이 대통령은 동아일보 예상대로 이 장군을 새 총리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여론상 이범석 씨의 명망이 가장 높으므로 민의에 따르겠다”고 했다. 이 장군에 대한 인준안은 그해 8월 2일 찬성 110표, 반대 84표로 통과됐다.

인준안 통과 후 이 대통령은 “장관 인선은 총리와 협의해 인격본위(人格本位)로 등용하겠다”고 밝혔다. 정말 이대로 됐을까. 이 장군은 국무총리 인준에 도움을 준 한국민주당 인사를 장관 자리에 추천할 때마다 이 대통령이 “그 자리는 내가 벌써 생각해 놓은 사람이 있다”, “왜 하필 그 사람이야?” “그 사람 언제부터 알고 지냈어?”라고 답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코드 인사’라는 말은 노무현 정부 이후 등장한 신조어지만 대통령과 고향이 비슷한 사람 등 ‘자기 사람’을 총리나 장관에 앉히고 싶어 했던 건 정부 수립 때부터 계속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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