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72년 8월 3일자 1면은 이렇게 큼지막한 제목을 달았다. 전날 오후 11시 40분 박정희 정권은 ‘경제의 성장과 안정에 관한 긴급명령 15호’를 발표한다. 나중에 ‘8·3조치’라고 부르게 되는 ‘사채 동결’ 조치였다.
이에 따라 모든 기업은 1972년 8월 2일 현재 보유하고 있는 모든 사채를 정부에 신고하면 월 이자 1.35%,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 방식으로 갚을 수 있었다. 1.35%를 연리로 바꾸면 16.2%. 당시 시중 사채 금리는 연리 40~50% 수준이었으니 기업들로서는 이자가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고 갚는 날도 최장 8년 뒤로 밀리는 셈이었다.
당시 연평균 15% 안팎이던 물가 상승률까지 감안하면 기업들은 사실상 무이자 혜택을 누리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정희 정권에서 이런 반(反)시장적이고 초법적인 특혜를 기업에 준 이유는 뭘까.
한국 기업들은 외국에서 빌린 돈으로 공장을 지어 1960년대 고도성장을 이뤄냈다. 그러다 1971년 미국 정부는 달러를 은행에 가져가면 금으로 바꿔주면 ‘금 태환 정책’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자 한국은 ‘신종플루’에 걸리고 말았다. 원·달러 환율이 급등하면서 외국에서 돈을 빌린 기업들에 위기가 닥쳤다. 여기에 시설·운영자금을 사채 시장에서 끌어다 쓰던 기업들은 문자 그대로 숨이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렸다.
박정희 정권도 처음에는 이런 기업은 정리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이들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컸다. 그달 9일까지 기업에서 신고한 총 사채 액수는 3456억 원. 당시 통화량의 80%에 육박하는 수준이었다. 올 5월 시중 통화량(M2)이 2454조 원이니 현재로 따지면 2000조 가까이 사채가 돌고 있던 셈이었다.
8·3 조치 효과도 확실했다. 기업 부채비율은 1970년 313%에서 1973년 288%로 떨어졌다. 1972년 5.7%까지 내려왔던 한국 경제 성장률은 1973~1979년 평균 10.3%로 올랐다. 같은 기간 세계 경제 성장률은 4.1%였다. 또 당시 정부에서 단기금융법 상호신용금고법 신용협동조합법을 제정하면서 제2 금융권이 탄생해 금융시장도 전환점을 맞았다.
그러나 사채로 돈을 불리던 서민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당시 기업에서 신고한 사채 중 당시 서울 고급 주택 가격에 해당하는 300만 원 이상은 전체의 1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을 꿈꾸며 소소하게 ‘돈 놀이’를 하던 돈이었다. 금융시장이 척박했던 상태라 서민들이 돈을 불릴 수 있던 수단은 돈 놀이가 거의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8·3조치 후 길게는 8년까지 빌려준 돈을 받지 못할 처지가 되자 자살자가 속출했다.
정부는 결국 30만 원 이하인 사채는 예외로 인정해 신고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지만 불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불만을 잠재우려면 ‘주먹’이 필요했다. 이 발표 후 석 달이 지나지 않은 그해 10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하고 헌법 효력을 정지시켰다. ‘10월 유신’이었다.
이 조치에 대한 평가도 그만큼 엇갈린다. 8·3조치 후반 작업에 참여했던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조치다. 국민의 사적 재산권을 침해한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정말 부득이하고 불가피했다. 이런 측면을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이 조치가 없었다면 1973년 제1차 오일쇼크를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반면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 “8·3조치로 우리 기업은 무채를 겁낼 줄 모르고 몸집을 불리는 차입경영과 그룹경영으로 치달았고 자본을 충실히 하고 자기 사업에만 집중하던 우량 기업들이 오히려 시장경쟁에서 밀려나는 계기가 됐다. 우리 경제는 구조조정으로 대외 경쟁력을 강화한 것이 아니라 사채동결이라는 편법에 의존함으로써 위기관리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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