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경남 함양의 황석산성을 취재하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다 못해 저려옴을 느꼈다. 황석산(1190m)의 능선을 따라 설치된 산성을 찾아 오르는 길에 만난 ‘피바위’ 때문이었다. 성의 남문지(南門址) 근처 널따란 암석지대를 설명하는 입간판은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치마폭으로 얼굴을 가리고 수십 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꽃다운 여인들이 줄줄이 벼랑으로 몸을 던졌으니 이 어찌 한스러운 비극이 아니겠는가.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
입간판은 피바위에는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피맺힌 한이 스며들어 그 혈흔(血痕)이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피바위 위로는 족히 수십 m쯤 되는 가파른 벼랑이 산성으로 이어졌다.
420년 전 이맘때 숱한 아녀자들까지 비장한 죽음으로 내몬 왜군의 수괴는 가토 기요마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력제로 바치겠다며 조선 호랑이를 마구 사냥해 ‘호랑이 가토’로 불린 그는 조선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한 학살자로 더 악명을 떨쳤다. 사명대사가 가토와의 대담에서 “조선 제일의 보배는 그대(가토)의 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조선의 원성을 샀던 인물이다.
가토는 1597년 7월 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이 승리하자, 곧바로 일본군 우군의 선봉을 맡아 육지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당시 왜군 총대장 고바야가와 히데아키는 좌군(4만9000여 명)과 우군(6만4000여 명)의 2개 군으로 재편성해 호남정벌 작전을 펼쳤다. 좌군은 진주와 구례를 거쳐 수군과 합세해 남원성을 공략한 뒤 전주성으로 가고, 우군은 밀양과 합천 등을 경유해 거창, 안의(안음) 등을 공략한 뒤 전주성에서 좌군과 합류하는 계획이었다. 우군 중 약 3만 명의 주력부대를 이끈 가토는 의병장 곽재우가 지키고 있는 화왕산성(창녕)을 포기하고, 대신 전라도로 들어가는 길목인 황석산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성을 지킨 백성과 도망간 순왜(順倭)
1597년 8월 15일, 가토가 이끄는 왜군이 겹겹이 포위한 황석산성은 전쟁의 살기(殺氣)가 성 안팎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 모처럼의 풍년이 들어 성 안에는 곡식이 빼곡히 쌓여 있었다. 왜군은 전쟁을 치를 군량미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이 성을 탈취해야 했다.
왜군은 철포대를 배치하고, 둘레가 약 3km에 달하는 산성 주위 여러 산봉우리에 화포를 갖춘 진까지 구축했다. 그러나 왜군이 철포와 화포를 아무리 쏘아대도 성안의 조선 관군 500명과 백성 수천 명은 결사적으로 성을 방어했다(7000명이라는 주장도 있음). 예상 외의 저항에 부닥치자 당황한 왜군은 심리전을 펼쳤다. 왜군의 통사(通事·통역관)가 성 안 사람들에게 들리게 조선말로 소리쳤다.
“개산(介山)아. 네 부친이 여기 있으니 문을 열고 나와 보아라.”
개산은 김해 사람이었다. 김해는 임진왜란 이후 일찌감치 왜군의 수중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순왜(順倭·왜군에 협력하는 자)가 된 이들이 적지 않았다. 개산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초부터 왜적에게 붙어 적이 성을 함락시키는 일을 도왔다.(‘난중잡록’)
왜군이 김해 출신 성안 사람들을 겨냥한 심리전을 펼친다고 판단한 김해부사 겸 출전장(出戰將) 백사림은 본보기로 개산을 참수하여 성밖으로 내던졌다. 무장(武將)이기도 한 백사림은 자신의 관할 지역인 김해 사람들을 이끌고 황석산성에 합류해 동문과 북문을 지키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나 왜군은 “100명의 개산을 죽인다 한들 우리가 무엇을 아깝게 여기겠는가”하고 비웃었다. 다음날인 8월 16일, 통사가 또 와서 최후 통첩을 했다.
“성을 비워두고 나가면 쫓아가 죽이지는 않겠다.”(‘난중잡록’)
그날 밤 왜군은 총 야간 공격을 펼쳤다. 성안 사람들도 필사적으로 왜군과 맞섰다. 병사들은 활과 칼을 쓰며 왜군에게 대항했고, 무기가 없는 백성들은 낫과 죽창을 들었다. 부녀자들은 냇가의 돌을 실어 나르고 끓는 물을 이용해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들과 맞섰다. 황석산성 발굴 보고서에 의하면 성벽 주변에는 성내 계곡의 냇가에서 행주치마로 운반해온 듯한 주먹만 한 크기의 몽돌들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부녀자들이 공격해오는 적을 향해 던진 난석(蘭石)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10배 이상의 정예화된 왜군의 병력과 막강한 화력 앞에서 중과부족이었다. 왜군의 기세에 놀란 김필동이 김해 사람 20여 명을 인솔해 몰래 동문을 열고 성을 빠져나가 왜적에게 투항해 버렸다. 성문을 지키던 백사림도 밧줄을 이용해 자신의 가족들을 먼저 탈출시킨 뒤, 왜군 복장으로 변복을 한 채 탈출했다(왜적에게 붙은 김해부의 아전과 백성들의 꼬임에 넘어가 백사림이 성을 넘어 도망쳤다는 기록도 있다).
산성내 조선 관군의 총지휘관인 백사림이 달아나자 군사들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고, 성은 결국 무너졌다.
“당초 백사림은 ‘내가 비록 죽을지언정 성중(城中)에 앉아 있겠다’고 백성들에게 약속했었다. 백성들은 그 약속을 금석(金石)처럼 믿고 성중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 온 성중 사람들이 그 기미도 모르고 모조리 왜적의 손에 함몰되게 하였으므로, 사로잡힌 사람들이 통분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선조실록’)
조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전투는 이튿날인 8월 17일까지 이어졌다. 백사림이 달아난 것도 모른 채 성의 남문을 지키던 수성장(守城將) 곽준(안음현감)은 끝까지 성안 사람들과 함께했다. 성내로 침입한 왜군들이 사람들을 마구 도륙했다. 곽준의 아들과 사위들이 울면서 빨리 피신책을 세울 것을 청했다. 곽준은 “이곳이 내가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을 다시 세운단 말인가”하고 웃으며 말했다. 곽준은 왜군들에게 빼앗길 것을 우려해 무기고와 식량 창고를 불태우도록 한 뒤, 호상(胡床)에 태연하게 걸터앉아 왜군의 칼을 받았다. 왜군은 곽준의 목을 베어 수급을 챙겼다. 곽준의 두 아들 곽이상과 곽이후가 아버지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여버렸다. 가까스로 성을 빠져나온 곽준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마저 왜적에게 사로잡혔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스스로 목을 매 죽고 말았다.(‘선조수정실록’)
곽준과 함께 황석산성을 보수하다가 병을 얻어 벼슬을 내려놓은 조종도(전 함양군수) 역시 성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종도는 “성이 위태롭고 소임이 교체됐으니 떠나도 된다”고 사람들이 권했지만 듣지 않고 성내에 머물고 있던 중이었다.
“평상시 벗에게 죽기로 약속해도 배반해서는 안되는데, 하물며 국가를 위해 성을 지키자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더구나 적병이 이미 움직였는데 새 군수는 도착하지 않았으니, 내 어찌 곧장 떠날 수 있겠는가.”(‘대소헌행장’)
조종도는 성안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들을 설득해 함께 성을 지켰다. 그는 성으로 들어가기 전 ‘공동산 밖에서 사는 것도 즐겁지만(공동山外生猶喜), 장순과 허원처럼 성을 지키다 죽는 것도 영광이네(巡遠城中死亦榮)’라는 시를 남겼고, 그 시처럼 황석산성에서 의로운 죽음을 맞았다. 그의 부인과 아들도 절명했다.(‘징비록’)
피신을 권유받던 군무장 유명개(거창좌수) 또한 “구차히 살아서 무엇을 하리. 너희들은 나가서 후일을 도모하라”고 한 뒤 순절했다. 그의 부인은 자결했다. 두 아들은 이미 북문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유명개는 황석산성을 보수할 때 많은 재산을 희사하고 가노까지 동원하는 등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인물이다.
남편의 명예를 위해 순절한 여성도 있었다. 거창현감 한형이 군병을 모집하는 일로 밖에 나가 있던 참에 아내 이 씨는 성 안에 있다가 적의 공격을 받았다. 이 씨는 남편이 군병 모집을 핑계로 도망쳤다는 오해를 살까봐, 성 밖으로 피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었다. 결국 이 씨는 성이 함락되자 그의 딸 한 씨와 함께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시비(侍婢) 한 사람도 스스로 목을 찔러 따라 죽었다.(‘선조실록’)
황석산성 전투는 이처럼 조선 지도층의 강건한 선비정신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보여준 숭고한 역사로 평가된다.
8월 17일 왜군은 산성을 완전히 점령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수천 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다. 성안에 남아 있던 곡물들은 모두 왜군들에게 약탈당했다. 가토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주인장(朱印狀)’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밤에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김해상관의 목을 베고(곽준을 백사림으로 오인), 성 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1597년 8월 17일 작성)
숭고한 희생의 중심이었던 백성들
조선 관군과 백성이 거의 몰살됐다는 뜻이다. 황석산성 전투에서 도망쳐 나온 백사림은 이후 투옥돼 심문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다. 그러나 이후로도 산성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그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가 10여년간 끊이지 않았다.
황석산성 전투 결과를 당대 사람들은 어떻게 평가했을까. ‘죽음이 뻔한 상황에서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백사림이 몰래 도망간 것은 잘한 일’이라고 비호하거나 ‘곽준이 성을 지킨 것은 헛된 죽음’이라고 곽준의 죽음을 폄훼하는 세력도 있었다.(‘대암집’) 그러나 대다수 사람들은 공직자인 백사림의 처사는 잘못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420년 전의 백사림은 살아남았지만, 420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이름은 오욕(汚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기자는 황석산성에 이어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의 황암사를 찾았다. 황암사는 정유재란이 끝난 지 100여 년 후인 1714년 숙종이 황석산성에서 순절한 의사(義士)들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직접 제관(祭官)들을 파견해 제향을 올렸다. 그러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불태워 없애버렸는데, 2001년 지역 민간인들이 힘을 합해 재건했다. 사당 뒤에는 당시 사망한 3500여 명의 백성들을 기리는 호국의총도 새로 조성됐다.
매년 황석산성이 함락되던 날을 추념하는 제사 때만 공개되는 사당문을 안의면사무소의 도움으로 열고 들어가 보았다. 사당은 중앙에 3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고, 그 좌우로 각각 3위와 4위의 신위가 배치돼 있었다. 놀랍게도 사당 중앙의 신위 3위 중 한가운데는 ‘황석산성순국선열제위’라는 이름의 신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좌우로 조선의 선비정신을 실천한 곽준(왼쪽)과 조종도(오른쪽)의 신위가 모셔졌다. 민초와 관리 구분없이 황석산성에서 산화한 모든 이들을 중심으로 한 배치였다. 다른 배향 시설에는 좀체 찾아보기 어려운 구조였다. 사당 한쪽 곁에 새겨진 충혼비 비문이 잊혀지지 않는다. 2001년 황암사를 중건하면서 시인 구상(작고)이 남긴 글이다.
“우리는 어느 때 어느 싸움에서 이런 충의와 충용과 충절에 빛나는 호국의 충혼을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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