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그에게 극작가 겸 연극평론가가 많으냐고 물었다. 둬 명의 이름을 얘기하는데 내가 귀에 익지 않다는 표정을 짓자 대뜸 “브레히트도 그랬다”고 했다. 자신을 브레히트에 비견한 것이 아니라, 극작가 겸 평론가가 ‘있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듯했다.
그가 방어적으로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연극계는 극작과 평론을 함께 하는 데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어서다. 한 사람이 창과 방패를 다 들고 있는 것은 ‘모순’이라는 것이다. 극작과 연출을 겸업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대한데, 둘은 ‘창작’이라고 봐주기 때문이다. 작가가 공부를 하면 작품이 재미없어진다는 말도 한단다.
“극작과 평론을 함께 하는 것을 편치 않게 보는 지점이 있었지만, 시대가 달라졌다. 극작, 연출, 출연, 평론의 경계가 낮아지고 요즘은 장르까지 넘나든다. 외국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유명 연극학자 파트리스 파비스 교수도 ‘평론가가 작품을 쓰면 연극인들은 싫어하지만 그래도 몰래 글을 쓴다’고 말한다.”
그는 몰래 글을 쓰지 않는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극작과 평론을 함께 하면, 짠 평가를 받을 것이다, 손해를 볼 것이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가고 싶은 길이 있으면 가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상당히 달관한 태도다.
90년대 이후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은 연극평론가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연극평론은 등단의 문이 그리 많지 않다. 희곡이나 연극을 공부한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연극평론가라고 부르고 불리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한국연극평론가협회는 6월에 출판한 ‘세월호 이후의 한국연극’이라는 책에서 회원을 80여명이라고 소개했다.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그 중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채 반도 안 될 성싶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전문지 할 것 없이 이들의 욕구를 채워주기에는 연극평론 지면이 턱없이 부족해서다.
극작과 평론을 하고 있으니, 연출까지 할 생각은 없는지 물어봤다. 사실 이 질문은 그것까지는 언감생심, 이라는 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던진 질문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처음부터 연출지망이었다. 김석만 연출 밑에서 조연출을 했다. 너무 가부장적인 분위기여서 힘들었다. 여자가 연출을 하려면 대단히 강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부시절에도 선배 밑에서 연출을 한 적도 있고.”
그는 본격적으로 연출을 준비하고 있다. 혼자서 쓰고, 연출하고, 비평까지?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것 같다.
비판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가 극작과 평론, 양쪽에서 존재가치를 증명한 것에는 이의를 달기 어렵다. ‘그’는 누구인가, 조용하지만 욕심 많은 김명화(51)다. 8월 10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내 인터뷰의 빠진 고리는 연극평론가다. 그래서 극작보다는 평론 쪽에 더 무게를 두고 인터뷰를 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1. 평론으로 시작한 연극인의 길 그는 94년 예음문화재단 예음상 평론상을 받으며 먼저 연극평론가로 등단했다. 좁은 문을 거쳐 ‘정식으로’ 평론가가 된 것이다.
그는 곧바로 월간지(객석)에, 1년 후부터는 주간지(뉴스플러스)에 정기적으로 연극평론을 게재한다. 신기했다. 잡지사에서 신인에게 고정면을 주는 것은 드물어서다.
“92년에 월간 ‘한국연극’에서 평론가로 추천한 적이 있다. 수습기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98년 이화여대 사범대 교육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연극영화학과에 들어가 92년 ‘에르빈 피스카토르의 무대기술에 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2000년 ‘오태석의 희곡 공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러고 보니 박사학위를 받기 전까지는 월간, 주간, 일간지 등에 비교적 짧은 연극평(리뷰)을 많이 쓰고, 박사학위를 받은 이후에는 연극평론, 한국연극 등에 호흡이 긴 평론을 게재한다. 2006년에는 그간에 썼던 리뷰를 묶어 ‘김명화 연극리뷰집-저녁 일곱 시 반 막이 오른다’, 평론을 묶어 ‘김명화 연극평론집-연극의 길, 세상의 길’(둘 다 ‘연극과인간’)을 펴냈다. 리뷰집에는 181편의 리뷰가, 평론집에는 21편의 평론이 실려 있다. 이때 ‘카페 신파’라는 작품집도 함께 냈다.
그는 연극평론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갖고 있다.
“연극 예술이란 작품이 영원히 남는 문학이나 미술과 달리 일회성이란 속성을 지니기에 비평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 비평은 공연이 끝나자마자 휘발될 연극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알리바이이며, 그것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유일한 증표이다. 따라서 작품을 오독한 비평이 남겨질 경우 다른 예술 장르와 달리 이후의 역사에서 그 비평을 전복할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될 수밖에 없다”(현대 연극과 연극비평, 2000년 봄 표현과 상상 워크숍 강연, ‘연극의 길, 세상의 길’에서 재인용).
그는 다른 논문이나 좌담회에서도 같은 얘기를 여러 번 했다. 내 표현대로 하자면 ‘존재하는 것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되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니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뜻이리라.
그의 리뷰와 평론을 읽으며 개성이랄까, 특징 같은 것을 몇 가지 발견했다. 사변적인 단어와 메타포를 많이 쓰는 것은 다른 평론가들도 그렇긴 한데, 그의 글은 초지일관 그런 기조를 유지해 대나무의 마디가 촘촘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다른 평론가들의 글보다 어렵다는 뜻은 아니다. 끝까지 신경을 써서 읽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상대적으로’ 이해하기가 쉽다(나는 연극평론가들의 글쓰기에 매우 비판적이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어려운 글을 쓸 수 있는지 묻고 싶다. 평론의 당사자인 극작가도, 연출가도 평론가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다른 특징으로는 글의 끝 문장에 액센트를 두는 것이다. 대부분의 글쟁이가 그렇긴 하지만 그는 유독 거기에 매달리고, 종종 성공을 거둔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폭식과 강한 양념에 젖은 우리의 소화기관으로는 좀 싱거운 요리였다”(국립극단 ‘노부인의 방문’을 연출한 클라우스 메츠거를 평하며, 객석 1994년 12월호).
“가야할 곳이 있다면, 따뜻한 방을 떠나 한파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법. 가거라, 욕망이 원하는 대로, 연극이 가고자 하는 길로(강화정과 뮈토스의 ‘없어질 박물관의 초대’, 한국연극 2001년 2월호).
“연변 처녀가 사랑이 어려워 어쩔 줄 몰라 할 때, 혹은 세상에 지친 두 남자가 술자리에서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하는 장면들은 너무 담담하고 맑아서, 오히려 인생이 섭섭하게 느껴질 정도였다”(박근형의 ‘선데이 서울’, 객석 2004년 8월호).
그의 글 마무리에서 나는, 직전까지의 주관적인 글쓰기에서 객관적인 입장으로 한발 물러선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의 이런 지적에 대해 그는 “평론가는 객석에 앉아 연극을 공부하고 분석하지만, 부분이 아니라 연극 전체를 육화해서 판단해야 한다, 즉 숨을 쉬며 전체 연극을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런 의도를 담아 글을 마무리 짓는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내 의견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은 것 같다.
또 하나. 그는 제목을 비틀어서 비평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제목이 에센스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비판을 하면 더 관심을 끌 수 있다”고 했다.
“감(感)은 이제 교감이 아니라, 유감이 되고 만다”(복합공연 ‘감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 객석 1998년 8월호).
“덕분에 무대와 관객 사이의 거리(距離)가 아름답게 익어가기 위해서는 좀더 많은 기다림이 필요할 것 같다”(이만희 작 강영걸 연출 ‘아름다운 거리‘, 뉴스플러스 61호 1996년 11월 28일).
“그래서 ‘그 남자에겐 젊고 특별한’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유감스럽게도 연극적으로는 신선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다”(극단 봉원패 ‘그 남자의 젊고 특별한 여자’, 뉴스플러스 34호 1996년 6월 16일).
그가 좋아하는 현학적인 단어가 몇 개 있다. 고졸(古拙·기교는 없으나 예스럽고 소박한 멋), 위반(委叛·배반), 도저(到底·학식이나 생각, 기술 따위가 아주 깊음), 현현(顯顯 또는 顯現·명백하게 나타남) 등등인데, 어디서 이런 말을 배웠는지 모르겠다. 또 지점(地點), 단자(單子), 질료(質料), 비등점, 길항(拮抗)하다, 서성인다, 무화(無化)시키다(이 단어는 국어사전에도 없다), 소환해내다, 라는 단어도 특별한 의미를 담아 자주 쓴다.
하지만 이런 특징은 그의 글쓰기의 부분에 불과하다. 좀더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분석틀은 없을까. (내게는 벅찬 일이다). 그런데 평론가 김윤철 씨가 내 고민을 덜어줬다. 그는 2006년 김명화가 낸 세 권의 책에 대해 서평을 쓰면서 이렇게 분석했다.
“그의 글은 섬세함과 집요함, 감각성과 사유성, 문학력과 분석력, 남성성과 여성성, 단호함과 부드러움, 논리성과 창조성, 전문성과 대중성 등의 대립적 개념과 성품들을 자연스럽게 화해시키고 있어 읽는 즐거움이 쏠쏠한 편이다.”
대단한 칭찬이다. 김명화는 이 분석에 대해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 글의 지향점은 있을 것 같다. 성(聖)과 속(俗)이 다 있는 게 세상의 이치다. 그걸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연극이기도 하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대립된 개념’을 쓰게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미였다.
그의 글쓰기를 분석하는 것과는 별도로 “식성 좋게 이상주의를 먹어치우고 변절이라는 손수건으로 입술을 훔쳐내는 자본주의”(서울앙상블 ‘런던 양아치’, 뉴스플러스 30호 1996년 4월 18일), “연극이라는 허상의 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실제 인생을 통째로 저당 잡힌 채 살아가는 배우의 운명”(뮤지컬 ‘42번가’, 뉴스플러스 38호 1996년 6월 13일)이라는 표현은 절묘해서 마음에 든다(‘뉴스플러스’는 동아일보가 만드는 주간지였다. 나는 이번에 ‘뉴스플러스’가 연극평론에 오랫동안 지면을 할애한 것을 알고 뿌듯했다. 지금은 ‘주간동아’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만, 그의 글을 읽어보면 바로 느끼겠지만 긍정적인 평가에서 시작해 후반부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으로 비판하는 패턴이 80% 이상이다. 이런 스테레오 타입의 글쓰기 구조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듯하다.
평론 그 자체가 아니라 주변 얘기를 들어보자.
어떤 작품을 주로 보는지.
“우선 이슈가 될 만한 작품, 상업극보다는 의미가 있는 작품을 본다. 그리고 내가 젊었을 적에는 한국 연극계가 답답했는데, 그걸 깰 수 있는 게 역시 젊은 연극이라고 생각해서 젊은 연극 많이 봤다. 지금도 젊은 연극을 많이 본다.”
연극을 보면서 메모도 하나.
“초창기 땐 메모를 했다. 그런데 그건 옆 사람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배우의 호흡을 끊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은 메모를 안 하고, 머릿속에 넣어 두려고 한다. 공연 때는 공연만 본다.”
상대적으로 연기에 대한 언급이 적다.
“연극의 꽃은 연기라고 하지만, 그걸 문자로 포착해서 써야 하는데 감이 잘 안 잡힌다. 쓰려고 애는 쓰지만, 연기가 아니라 결국은 인물을 평하게 된다. 잘 한다, 못한다는 식으로. 다른 평론가들의 글도 보면 그런 고민을 하는 것 같고, 아예 고민 없이 써버리기도 하고. 영원한 숙제다.”
본인의 평이 틀릴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난타’가 처음 나왔을 때 비판적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훌륭한 문화상품으로 성장했다.
“지금 난타는 초연보다는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대중과 만나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제작자의 판단과 지원, 강한 의지가 작품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그런 류의 ‘스텀프’ ‘탭덕스’의 성공도 영향을 줬을 것 같고.”
그는 아리엘 도르프만의 ‘디 아더 사이드(The Other Side)'를 평하며 마지막에 이 작품의 구조와 함의가 ’고도를 기다리며‘와 비슷하다고 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본 적이 있기 때문에 나 같은 아마추어에게 이런 분석은 매우 유용하다. 그런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느냐.
“나는 천재가 아니다. 뭉개고 앉아 고치고 고치다 도달하는 것이다.”
리뷰와 평론에 불만인 사람과 마찰도 있을 텐데.
“밤에 전화해서 항의하는 경우도 있고, 일상에서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각오를 해야 하는 직업이다. 물론 그런 게 싫으면 안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적당히 이익을 얻고, 적당히 관계를 유지하는 게 좋다면 무엇 때문에 비평이 필요한가. 비평의 존재가치는 무엇인가. 이런 자문을 하게 되면 제대로 써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만 감정적으로는 쓰지 말자는 것이다. 나도 작품을 쓰는 사람이니까 비판을 받아본 적이 있다. 감정적으로 쓰면 금방 안다. 그런 오류는 피하자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그러나 연극평론은 다양한 문제를 안고 있다.
2002년 그를 비롯해 7명의 평론가, 극작가, 연출가, 배우 등이 참석한 ‘한국연극평론의 오늘’이라는 좌담회(2002년 1월, ‘연극평론’ 복간4호 게재)에서는 평론의 문제가 모두 도마 위에 올랐다(세상에, 15년이 지났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때 나온 문제들은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글쓰기 형식이 천편일률적이다 △희곡 분석이 많고 연출, 배우, 장치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 한다 △현장 작업자에 비해 품평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작품만 평하지 사회 밖의 관계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가족주의 때문인지 독한 소리를 못한다 △반론과 논쟁은 없고 감정싸움만 한다 △발표지면이 너무 부족하다, 는 등이었다.
그는 이 좌담회에서 “비평의 주된 기능이란 평가가 아니라 정밀하게 읽어주는 것, 표면에 드러난 것이 아닌 속살을 읽어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번 인터뷰에서도 “작품도 좋지만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의 고민과 변화를 읽어주는 것도 연극에서 필요하다. 모두가 다 직접 하려고만 하지 지켜봐주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연극인끼리의 문제’이다.
그래 그런지 그는 예전에 이런 고민을 했다.
“연극과 전혀 무관한 사람들, 연극을 태어나서 한 편도 보지 않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서 글을 쓴다면 어떤 글을 써야 되나. 무엇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나. 그들에게 엄정한 비판의 정신보다는 연극보기의 황홀함부터 알려주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데 황홀함이라니, 나 자신은 과연 그 황홀함의 끈을 계속 잡고 있는가. 연극이 삶의 축약도라면, 비평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될 지점은 연극을 통해 삶에 도달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저녁 일곱 시 반 막이 오른다, 연극과인간, 2006).
그의 고민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나는 그의 글과 그가 참여했던 좌담회, 토론회 기사들을 읽으며 아주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연극은 궁극적으로 관객을 전제로 한 것이고, 연극의 성패도 관객이 좌우한다고 말한다. 평론도 관객이 읽어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어느 글에도 관객의 시각이나 주장, 욕구 등이 빠져 있다. 그것도 완벽하게.
이 지적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집단의 관중과 함께 연극을 보고, 내가 거기에 반응한다. 관객의 반응이 물결처럼 내게 다가온다. 그러니 내가 쓰는 글은 관객을 대신해서 말해준다고 생각한다.”
평론가가 관객을 대변한다는 뜻이다. 그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평론가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지금까지는 옳았는지 모르지만, 지금부터는 틀렸다고 나는 생각한다. 연극제를 결산하거나 성패를 논하는 글에서조차 관객의 반응 하나, 코멘트 하나, 제안 하나 나오지 않는 것은 잘못 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에게 이런 문제의식을 본인은 물론, 다른 평론가들과도 공유해달라고 부탁했다. 적어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논의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는 신춘문예의 문을 여러 번 두드렸으나 5,6년간 계속해서 ‘미역국’을 먹었다고 한다. 그때의 심정을 “약이 바짝 올랐다”고 표현했다. 삼성문학상을 받은 데뷔작 ‘새들은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는다’를 비롯해 그의 입지를 굳혀준 ‘돐날’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첼로와 케챱’ 등이 모두 ‘낙방작’이었다고 한다(그러니 인생, 아무도 모른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김명화는 자신에게 의미 있는 작품을 꼽아달라고 부탁하자 ‘새들은…’(1997년) ‘돐날’(2001년) ‘침향’(2008년)을 들었다.
“‘새들은…’은 내가 화려하게 등단할 수 있도록 해 줬다. 등단이 화려하면 당분간 침체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돐날’은 그런 징크스를 깨뜨리며 내게 과분한 명성을 안겨줬다. ‘침향’은 제1회 차범석상 수상작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돐날’은 386세대의 찬란했던 꿈과 이상이 세월이 흘러 누추하고 비루하게 퇴색해가는 모습을 극사실주의 수법으로 탁월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고, 아주 세밀하게 분석한 평론도 쏟아졌다.
그가 여성 작가라는 점에 주목한 평도 있다.
“젊은 여성작가 김명화는 젊은 여성들의 술 마시는 순간에서 그녀들의 삶의 핵심적 순간들을 발견하고자 했으며, 술 마시는 순간의 묘사에서 남성 작가로는 불가능한 여성들의 감성의 파동들을 빼어난 섬세함과 그 나름의 리얼리티로 재현하고 있다”(김방옥. ‘돐날’ 음식, 술, 광기, 그리고 여자와 남자, 연극비평, 2002).
그러나 이 작품은 비난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우선은 먹는 것 갖고 장난치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1막과 2막은 일상적 모습과 다르지 않은데, 3막은 난장판을 만들고, 내면을 들여다보고, 동성애도 넌지시 내비추고 해서 일상적이지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아예 좋은 작품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었다. 작품을 발표할 당시는 사실주의가 그리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던 시기였다. 거기다가 어두운 얘기이기도 하고.”
나는 이 작품을 읽고 두 가지 질문을 했다(공연은 보지 못했다).
‘황정숙’이라는 캐릭터가 너무 순종적이지 않느냐, 요즘 그런 여자가 어디 있느냐.
“가장 진취적인 사람 속에 보수적인 면도 내재한다. 주변의 내 친구들이 그렇다. 이중적인 삶을 살고 있다. 정숙과 경주는 같은 인물일 수 있다. 정숙은 꿈을 포기했고, 경주는 꿈을 좇았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나는 생에 대해서 그리 낙관적이지 않다.”
성공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사는 386세대는 전부 비루한 것인가.
“등장인물은 이 사회에 안정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구조의 모순 속에서 타락을 망설이기도 하고…. 젊었을 적 순수하고 찬란했던 청춘에 비하면 비루하다.”
그는 세 작품에만 눈이 가 있지 않다.
“다른 작품들도 다 자리를 잡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해 애틋하고 미안하다. 어떤 작품은 예쁨을 받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못했다. 세상의 눈이 다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의 ‘욕심'은 상으로도 보상을 받았다.
김상열연극상(2000년), 동아연극상 작품상, 대산문학상 희곡상(이상 2002년), 아사히신문 공연예술대상(2003년),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예술가상(2004년), 제10회 여석기 연극평론가상, 제1회 차범석희곡상(이상 2007년)을 수상했다.
작가로서 그를 말하며 꼭 언급해야 할 것이 있다. 연출과의 관계다.
그는 작품집 ‘카페 신파’의 맨 뒤에 쓴 ‘작가의 말’에서 자신의 두 작품(‘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과 ‘첼로와 케챱’)은 나름대로 실험적인 시도를 한 것 것인데, 연출이 본래와는 전혀 다르게 해석해서 무대에 올렸다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는 “창작 초연의 공연은 작가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주어야 하고, 작가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까지 고치고 싶을 정도로 결함이 보인다면 연출가는 그 작품을 선택하지 말아야 한다. 작가는 연출의 취향대로 글을 쓰는 스크립터가 아니다”고 일갈했다.
그는 전부터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98년 이강백 작, 이윤택 연출의 초연 ‘느낌, 극락같은’(예술의전당 기획)을 리뷰하며 연출이 작가의 창작 의도를 철저하게 무시했다고 지적하고, “다만 남겨진 것은 작가를 지워버린 연출의 욕망, 극락 같은 느낌 대신 세속적인 형상에 대한 집착만이 자리잡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김명화가 연출을 문제 삼은 두 작품이 초연된 지 15년이 훌쩍 넘었다. 그래서 물어봤다. 아직도 불만이 있느냐고. 이 질문에서도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작품집을 다시 내기 위해 ‘첼로와 케챱’을 다시 읽어봤다. 초연 때 연출가가 꽤 애를 먹었겠구나, 내가 어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사람이면 숨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따라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는 뜻). 나는 생(生)‘에 낙관적이지 않다고 했는데,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도 내가 인생을 잘 모르면서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본인 작품에 대한 평도 자주 읽는 편인가.
“작가로 등단한 이후에는 내 작품에 대한 것을 많이 읽었다. 좋은 글도 있지만, 감정적, 폭력적인 것도 있었다. 그럴 때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많이 안 읽게 되더라.”
평론의 최고 고질이 읽는 사람이 적다는 것인데, 유명 평론가조차 남의 글을 안 읽는다고? 그러자 그는 “그래도 종종 읽는 편”이라고 눙쳤다.
이 대목에서 극작과 평론을 겸업하고 있는 데 대한 본인의 입장을 들어보자. 그는 여러 곳에서 비슷한 말을 많이 했다.
“작가와 비평을 겸하다보니, 나 역시 각각의 영역을 신성화하거나 고립하는 시각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연극 자체, 연극이 좋아지는 것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내 창작의 노력이 비평의 시각을 틔워주고 비평의 노력이 역시 창작에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내 작업들이 한국연극계를 풍성하게 하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하면 되는 것 아닌가”(에릭 벤틀리 선생의 탈리아상 수상을 기념하며, 연극과평론 복간 23호, 2006).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노력하겠고, 주변의 비판에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3. 새로운 도전, 연출 김명화는 자신의 작품을 본인과 달리 해석해서 무대에 올린 연출가들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아있는 듯하다.
그는 하짓날(6월 21일) ‘난희극단’이라는 1인극단을 세무서에 등록했다(‘난희’는 김명화의 아명이다). 직접 연출을 하고 싶어서다. 왜 연출을 하려고 하나.
“내가 원하는 이미지와 세계를 만들 수 있다. 과거 연극계는 작가 중심으로 텍스트를 중시했다. 그러나 점차 연출이 헤게모니를 쥐면서 작가는 피동적으로 선택받는 존재가 됐다. 국공립극단이 프로듀서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연출의 힘은 더 커졌다. (단원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단원을 뽑으면 단원을 책임지는 것이 우선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는 안 할 것이다. 그때그때 뜻 맞는 동지들을 모아 해 볼 생각이다. 올해 내라도 ‘솔랑시울길’을 재공연하고 싶다, 그리고 ‘여자 이야기’를 아마추어와 프로가 합쳐 만들었는데 이번에는 프로를 데리고, 여자 시리즈를 하고 싶다.”
‘솔랑시울길’은 지난해 10월 대전예술의전당에서 공연한 음악극으로 그가 각색과 연출을 맡았다. ‘여자 이야기’는 2010년 이화여대 동문극단이 공연했는데 이것도 그가 쓰고 연출했다.
연출을 하려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내 작품 중 무대에 오르지 못하거나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아픈 작품’도 기회가 있으면 올려보고 싶다.”
뭔가 심적인 변화라도 있었나.
“5학년(50대)이 되니까, 말짱하고 똑똑한 정신으로 일할 기간이 길어야 15년 안팎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이라면, 자비를 들여서라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려운 길을 가려는 것 같다) 내가 만만디다. 작은 것에는 안달복달하는데, 큰 것에는 오히려 느긋하다. 그러니 큰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는 어느 글에서인가, 연극은 내게 만족을 못하고 ‘더 갖고 와! 더 갖고 와!’라고 끝없이 요구할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연출도 그 연장선인가.
“젊었을 적에는 탈진할 정도로 일을 해도 좋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지치기도 한다. 에너지를 조절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은 분명 내게 더 갖고 오라고 할 것이다.”
이젠 중견 작가 겸 평론가다. 그런 자각은 있는지.
“없다. 타성에 젖는 것, 기성화되는 것이 잘 안된다. 그런 것에 열등감이 있다. 사람 사귀는 것도 잘 못하고, 까칠하기도 하고, 내 것을 차지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못하고, 그저 어정쩡하다. 경계선에서 서성인다. 그러니 작가하길 잘했다.” 4. 일상과 오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물었다.
“올해 안에 작품집을 새로 내기 위해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을 고쳐 쓰고 있고, 신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 신화는 조그마한 것을 넘어 큰 틀에서 생각하도록 만든다. ‘꿈’이라는 작품을 쓸 때 삼국유사에서 한국 신화를 만났고, ‘달의 소리’를 쓰면서 삼국사기에서 가야금을 만났다. 희곡은 계산을 많이 해야 하는 작업이다. 그런데 신화는 비약을 해도 된다. 스케일이 커진다. 두 작품이 훅훅 날아다니는 게 좋다.”
‘신화’의 세계는 극작가에게 넘어야 할 산이자 숙제인 동시에 소도(蘇塗)이자 안식처인 듯하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신화를 붙들고 씨름하는 극작가들이 많은 것을 보니.
그는 ‘달의 소리’ ‘바람의 욕망’ ‘왕궁식당의 최후’ ‘냄비’ ‘햄릿, 죽음을 명상하다’를 묶어 새 작품집을 내고, ‘카페 신파’에 실렸던 ‘새들은…’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첼로와 케챱’ ‘카페 신파’는 손질해서 다시 작품집을 낼 계획이다. ‘돐날’과 ‘침향’은 각각 따로 나와 있다.
이미 공연을 한 작품을 고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게 옳은 것인지 궁금했다.
“공연대본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희곡이니까 고칠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같은 작품도 버전은 여러 개다. 조금 더 완벽한 작품을 내놓고 싶어서 그렇다.“
가끔 연극인들에게 ‘먹고 살 만한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대부분 직답은 피하지만 그들은 매우 꿋꿋하다. 그는 글도 쓰고, 연구도 하고, 극작가 윤조병 씨를 만나 구술 채록작업도 하고 있다고 했다. ‘오랄 히스토리’를 쓰고 있는 것이다.
“5월에 제안을 받고 8월부터 시작했는데, 작가와 작가가 만나는 일은 드물다. 좋은 공부를 하고 있다.” 20여년이 지나면 어느 후배가 그에게도 구술을 받으러 오지 않겠는가(그렇다면 큰 영광이다).
그와 인터뷰를 하면서 풀게 된 오해 하나를 소개해야겠다. 나는 그가 대학생 때부터 골수 운동권인지 알았다.
‘새들은…’이 대학생 연극반을 배경으로 한 것이고, ‘돐날’의 주인공들이 386세대여서만이 아니다. 그는 글 곳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지금 이곳, 성고문과 난장판의 청문회가 올림픽 속에 묻히는 나라, 문민정부가 들어섰지만 레드컴플렉스가 여전히 유효한 나라, 그리고 인류 최후의 분단국이지만 주말엔 북한강변의 모텔에서 욕망의 불꽃이 건재함을 확인하고 평일엔 2002 월드컵을 향해 열광하는 나라, 아름다운 우리의 대한민국이니까”(저녁 일곱 시 반 막이 오른다, 뉴스플러스 49호 1996년 8월 29일)
“글을 쓰는 도중에 전직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 소식을 접했다. 허약했던 진보는 결국 이렇게 마무리되는가. 진보의 이상은 전 세계를 쓰나미처럼 휩쓸던 신자유주의 앞에 제대로 힘도 가누지 못했고 그나마 존재했었던 노력들은 보수정치와의 대결에서 철저하게 거부당했다. 우리들의 역사는 그저 총체적 실패로 후대에 기록될 것인가”(현실비판의 서사가 다시 돌아온다, 연극과평론 복간 33호, 2009년).
그런데 의외다.
“나는 운동권이 아니다. 대학가에서 가장 진보적인 분위기였던 동아리가 연극반과 탈춤반이었다. 그 속에서도 나는 예술지상주의였다. 그래서 동료들에게 깊은 미안함과 죄책감이 있다. 4학년 때인 87년, 데모현장에 몇 번 나가봤지만 나중에는 안 나갔다. 그들이 쓰지 못하는 것을 내가 쓰고 있을 뿐이다.” 5. 몇 개의 궁금증, 그리고 가족 그는 리뷰집과 평론집 서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배우가 하고 싶어 무대에 서 보기도 했지만 무대 공포증 때문에 단념했고, 극단에서 조연출을 한 적도 있지만 군대 같은 생활에 적응할 수 없었으며, 공부를 하면 지나치게 서구 중심의 커리큘럼이어서 내 연극적 정체성을 파악할 도리가 없었고, 연출 작업을 해보면 과도한 야심 때문에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왜 연극계를 떠나지 않았는가.
“다른 것은 특별히 좋아한 게 없었다. 연극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 그는 “나이가 들면서 주변을 수용하는 것도 조금은 가능해졌다”고 했다. “변했다고 써도 되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젊었을 적에는 ‘한 다혈질’했는데 자금은 괜찮다고도 했다.
또 하나, 그렇게 연극이 좋다면 처음부터 연극 쪽으로 가지 않고, 왜 이화여대 심리교육학과로 갔는지 궁금했다.
“성적에 맞춰 학과를 찾다보니 그렇게 됐다.”
한국 교육의 고질적인 병폐를 그에게서 다시 확인한다.
그는 심리교육학과에 전혀 정을 붙이지 못하고 1학년 2학기 때 사범대극회의 문을 두드린다. 그때 신입생을 뽑는 동아리가 연극반이 유일했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뭔가가 그를 당겼을 것이다(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노래에 맞춰 율동을 만들어 오라는 숙제를 다른 친구들은 다 무시했으나 자기와 친구들만 2개나 만들어가 시연을 했다고 소개했다. 공연에 끼가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는 대학 졸업 후 4개월 정도 방송 스크립터로 일했지만 넉넉한 보수가 그의 꿈마저 꺾지는 못했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중앙대, 한예종, 서울산업대, 서울대 대학원, 고려대, 서울예대 등에서 강의도 했다.
태생이 연극 쪽이 아니어서 눈총을 받은 적도 있을 것 같은데.
“내 기질 자체가 강력접착제가 아니고, 비주류다. 말끄러미 사람을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어 혼난 적도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불편해 하더라.”
그는 혼자 있는 걸 즐긴다. 그리고 야행성이다.
“글 쓰는 사람들이 원래 혼자 있는 걸 즐긴다. 그래도 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아니니까 그나마 다행이다. 연극은 함께 하는 것이 고맙다. 혼자 있을 운명을 연극이 상쇄해 주니까. 어떤 때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후달릴 때도 있다.”
‘힘이 모자란다’는 뜻의 ‘후달리다’라는 방언을 쓰는 걸 보니 그는 경상북도 출신이 틀림없다.
그는 김천에서 6녀1남의 막내로 태어났다. 5녀1남일 때 아들을 하나 더 낫겠다고 뒤늦게 더 낳은 자식이 김명화다. 연탄공장을 경영하시던 아버지는 실망한 나머지 “하루쯤 나갔다 오겠다”며 ‘가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 대해 좋은 추억을 갖고 있다. ‘카페 신파’에 “신극(新劇)은 처음 본다”며 좋아하는 노인이 등장하는데, 아버지가 모델이다. 김명화는 그 말이 “우습기도 하고, 아프기도 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2014년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김명화는 얼마 전 늙은 아버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봄날’이라는 공연을 보고 “옛날 볼 때와는 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연극 속의 늙은 아버지와 젊은 아들들의 대립이 더 강했던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의 부재로 대립구도에 대한 감각이 무뎌졌다는 뜻이리라. 가족의 빈 자리는 이처럼 살아있는 삶에도 영향을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서 막내 냄새를 맡기가 힘들다. 약간 내성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웃으면서 “친한 사람에게는 막내처럼 행동한다. 그렇지만 고민하는 작가, 고민하는 평론가의 체질이 몸에 배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나는 그에게 한국 연극계에 부탁하고 싶은 말을 해 달라고 판에 박힌 요구를 했다.
“공연 한번 하고 작품을 버리는 것, 텍스트를 정밀하게 읽지 않는 것, 합리적인 개런티 기준을 만드는 것, 효율적인 공동작업 시스템을 만드는 것, 지원금 제도를 투명하게 바꾸는 것 등등이 필요하다.”
그는 아직 비등점에 도달하지 않은, 여전히 단자적 삶에 자긍하는 극작가 겸 평론가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소신에서 우러나온 질료로써 평범한 세상을 위반하되, 고졸함을 갖춘 도저한 작품과 평론이 현현하기를 갈구한다. 그는 또 극작과 평론을 넘어 연출로 가는 지점에서 서성이면서 상치되는 가치들이 길항하는 이유를 소환해 낸다. 세상의 우려를 무화시킬 수 있는 길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그가 자주 쓰는 단어로 그를 묘사해 봤다).
여성 작가에게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으나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최근 한 퇴역 장성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군인은 계획과 싸우지 말고 적과 싸워야 한다.” 전쟁이 벌어졌을 때, 평시에 만들어 놓은 작전 계획에 매달려서 현장과 현실을 무시하면 전쟁에서 진다는 얘기다.
연극도 그런 것이 아닐까. 현실이 적보다 빨리 변하는 시대다. 머리로 만든 희곡, 이론에 맞춘 평론이 이 시대에 무슨 의미를 지닐 것인가. 김명화가 그런 의문에 귀를 기울이는 연극인이 되길 기대해 본다.
(김명화가 쓴 작품은 다음과 같다. ‘새들은 횡단보도로 건너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그것은 인간’ ‘첼로와 케챱’ ‘돐날’ ‘강건너 저편에’(히라타 오리자와 공동창작) ‘카페 신파’ ‘달의 소리’ ‘바람의 욕망’ ‘왕궁식당의 최후’ ‘침향’ ‘밤으로의 긴 여로’(드라마투르그) ‘여자 이야기’(작·연출) ‘냄비’ ‘꿈’ ‘서편제’ ‘솔랑시울길’(각색·연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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