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살벌했던 날, 포성이 지척에서 들리는 최전방 도시, 시민으로부터 버림받은 도시, 버림받은 사람만이 지키던 헐벗은 도시를 그 남자는 풍선에 띄우듯이 가볍고 어질어질하게 들어올렸다. 황홀한 현기증이었다. 이 도시 골목골목에 고인 어둠, 포장마차의 연탄가스, 도처에 지천으로 널린 지지궁상들이 그 갈피에 그렇게 아름다운 비밀을 숨기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었다.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박완서 소설 ‘그 남자네 집’ 중에서
‘최전방 도시’의 묘사만 아니었다면 이 문장들은 첫사랑의 순전한 황홀함만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실제로 박완서 씨의 장편 ‘그 남자네 집’은 첫사랑에 대한 자전적인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이 소설에 대해 “힘들고 지난했던 시절을 견디게 해준, 문학에 대한 헌사”라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이 소설은 전쟁으로 인해 빈곤과 궁핍뿐인 하루하루를 나야 했던 젊은 여성의 이야기다. 우연히 시작된 사랑의 감정이 마른 시간을 견디게 해준다. 사랑은 가슴을 고무공처럼 통통 튀게 하고 온갖 궁상도 꽃처럼 아름답게 변신시킨다. 사랑이 계속 아름답게 이어지면 좋으련만 암울하고 극빈한 전시(戰時)는 사랑이 사치인 때다. 여자의 선택은 철없어 보이는 동생뻘 첫사랑이 아니라 가난을 메울 수 있는 예닐곱 살 연상의 은행원이다.
작가는 시간이 지난 뒤 두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함으로써 아름다운 청년과 처녀로 남았으면 좋았을 기억을 헤집어놓는다. 그 일은 치욕스러운 것이지만, 작가는 이 수치감과 모멸감 또한 고스란히 드러내 놓는다. 치욕을 견디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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