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론자도 아니고 시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직업이 사람을 만나 그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편린을 듣는 일이다 보니, 가끔 어느 시인의 시를 떠올릴 때가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머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리고/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다. 한 인간에 대한 경의를, 그것이 누구이든 간에, 이처럼 쉬운 말로 노래한 시는 드물다. 그래서 울림이 있다.
그를 인터뷰하면서도 슬그머니 이 시가 떠올랐다. 그의 과거가 그리 평탄치 않았는데도, 그 과거에서 오늘을 만들었기 때문일까. 그 오늘이 엄청 화려하진 않아도 그는 만족하고 있고, 충분히 그럴 만하다. 진부한 표현을 빌자면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연극인들을 인터뷰하기 위해 사전조사를 하는 과정에서였다. 작가나 평론가, 교수들이 쓴 연극관련 책들이 대부분 같은 출판사에서 나왔다. 또한 서문에 그에게 감사한다는 인사가 빠지지 않았다(돈 안 되는 책을 내주는 것은 공치사가 아니라 정말로 고마운 일 아니겠는가).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겼다. 이 출판사 사장은 어떤 사람일까. 왜 연극관련 책을 이처럼 많이 내는 걸까. 손해는 안 볼까. 이 출판사는 ‘연극과인간’이라는 출판사이고, 사장은 박성복 씨(62)다. 8월 11일 동아일보에서 ‘그’를 만났다.
1. 4남4녀의 막내라는 의미
박성복은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그가 5살 때 가족이 몽땅 서울로 이사를 왔다. 4남4녀의 막내였다. 아버지는 보성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식솔을 전부 데리고 서울로 온 것을 보면 농사를 지어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던 듯하다. 그렇다고 서울이 그들을 따뜻하게 품어줄 리도 없다.
“청계천 판자촌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막노동을 하고, 어머니는 살림만 했다. 형들은 호스를 팔러 다니고, 누나들은 미싱공장에 취업했다.”
빈한한 집안에서는 이런 일도 일어난다.
“어머니가 신문지로 도배를 하다가 종이가 모자라자 내 공책을 뜯어 도배를 했다. 그런데 그 공책은 다 쓴 게 아니고, 그 안에는 그날 선생님에게 보여줘야 할 숙제가 들어있었다. 선생님에게 혼이 났지만, 그런 사정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어렸을 적에 봤던 ‘검사와 여선생’인가 하는 영화가 떠오른다. 너무나도 집이 가난했던 주인공 소년이 배가 고파 술지게미를 먹고 학교에 갔는데, 술지게미에 취하는 바람에 여선생님에게 된통 혼이 나는 장면이. 하기야 그와 내가 봤던 국민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년)가 말해 주듯, 당시에는 그런 집이 한 둘이 아니어서 슬픈 축에도 끼지 못했다.
그래도 박성복은 행복했단다.
“청계천에 살던 내 또래들은 대부분 껌팔이, 구두닦이, 앵벌이를 했다. 그런데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하지만 그 행복은 중학교를 졸업하며 끝난다.
“홍익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고등학교에는 가질 못했다. 기술을 배우라는 말에 철공소를 다녔다. 친구들이 국민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나를 부러워했듯 이제는 교복을 입고 고등학교에 다니는 애들을 내가 부러워했다. 참을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인덕실업고등학교(현 인덕고등학교)를 찾아가 교장선생님에게 입학을 시켜달라고 했다. 입학만 시켜만 주면 수석으로 졸업하겠다고 호언했다. 그런 부탁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학교에서 남은 교복과 교과서를 내줬다. 원예과로 들어가 졸업하고 미대로 진학해 디자인을 전공했다.”
수석은 못하고 상위 5%로 졸업을 했는데, 8남매 중에 대학을 나온 건 그 혼자다. 보통은 장자에게 ‘올인’하는데, 어째 이런 일이…. “모든 가족들이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점점 형편이 피면서, 막내만이라도 대학에 보내자는 분위기가 생겼다.” 그는 참 좋은 형제들을 만난 것 같다.
그렇다고 그가 ‘놀고먹은 것’은 아니다. 막내답지 않게 죽기 살기로 일하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일’이란 무엇인가.
“처음 접한 신문이 동아일보였다. 중고등학교 때는 동아일보를 열심히 배달했다. 대학 다닐 때는 세계문학전집, 세계사상전집, 한국문학전집, 백과사전 등을 팔러 다녔다. 같은 학과 친구들에게 디자인관련 전집도 많이 팔았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는 ‘할부 전집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초인종이 울려 나가보면 책을 사라는 사람이 서있기 일쑤였다(지금 보험을 파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듯하다. 방문판매는 아니지만). 중산층이 생겨나고, 작으나마 거실이 있는 집이 늘어나면서 호화로운 장정에 통일성과 볼륨이 있는 ‘전집’은 거실을 장식하는 최고의 히트상품이었다(읽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고 나는 생각한다).
2. 출판인이 되다
전집 판매는 한때의 생계 수단으로 생각했지만, 그를 평생의 업으로 이끌었다. 그러고 보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연(緣)’이라는 게 분명, 있나 보다.
전집을 팔면서 그는 책의 내용과 출판 사업에 관심을 갖게 됐다. 스스로 무식하다고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그 중에서도 문학이 좋았다.
서른을 갓 넘기고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서 태동(泰東)이라는 출판사를 시작한다. ‘태동’은 동양(東洋)을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다. 주로 국문학 관련 서적을 발행했다. 5년 만에 말아먹는다. ‘말아먹었다’는 건 그의 표현이다.
“내가 볼링에 빠졌기 때문이다. 당시 직원은 편집, 영업, 경리 각 1명씩 3명이었는데 적자는 아니고, 현상유지는 하고 있었다. 내기 볼링을 하다 돈을 잃기도 했지만, 그것보다는 시간을 뺏겨 출판사에 전념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나는 사장감은 안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사장 자리를 버리고 친구가 경영하는 T출판사에 6년 간 영업상무로 일했다. 자기 자랑을 별로 내켜 하지 않는 그가 본인 입으로 “당시에는 영업의 전설로 불렸다”고 하니 책을 엄청 잘 팔았나 보다.
“내가 T출판사를 그만둔다고 하자 여기저기서 아파트를 사줄 테니 오라든가, 좋은 조건으로 동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그 때 독립을 안 하면 평생 독립을 못할 것 같아 새로운 출판사를 차리기로 결심했다.”
T출판사와는 끝이 좋지 않았다.
“내가 그만 둔다니까 경쟁상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친구가 퇴직금도 안 주는 등 냉정하게 대했다. 당시 업무의 90%를 내가 했는데 매우 섭섭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고맙기도 하다. 친구가 나를 혹독하게 대우했기에 다시 일어서려고 노력했고,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다고도 볼 수 있으니까.”
박성복은 그동안의 실패와 성공을 밑천삼아 43살 때인 1998년 서울 안암동에 도서출판 ‘월인(月印)’을 설립한다. ‘월인’은 금방 눈치 챘겠지만 세종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국보320호)’에서 따왔다. 한글 활자로 찍은 최초의 책으로 ‘천 개의 강에 비친 달을 노래한다’는 뜻인데, 인쇄 인(印)자가 들어 있어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달은 비록 하나지만 시공을 초월해 천 개의 강에 드리우듯, 출판을 통해 지식을 전파하고자 하는 마음도 담았으리라.
출판사는 너무 잘 됐다.
“서울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대학원생이나 강사 등이 쓴 좋은 원고가 한꺼번에 150개나 들어왔다. 본인과 직접 관계가 없는데도 몇 백 권씩 사주겠다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T출판사에서 알았던 사람도 있었다. 내가 원고청탁을 한 적도, 영업을 한 적도 없는데도 그랬다.”
‘영업의 전설’이 ‘신뢰’를 수확하기 시작한 듯하다.
박성복은 2000년 수유동의 개인주택으로 사옥을 옮긴다. 출판사가 그렇게 잘 된다면서 도심에서 더 먼 수유동으로 이사를 간 게 이상하다.
“수유동에서 ‘태동’ 출판사를 할 때 주변의 좋은 집들을 보면서, 언젠가는 돈을 벌어서 저런 집을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년 동안 세를 들었던 집을 4억을 주고 샀다. 꿈을 이룬 것이다. 사무실은 야간작업을 할 경우 일일이 경비에게 얘기를 해야 하고, 밥 문제도 어렵다. 그런 면에서 개인주택은 편리하다. 밥도 지어 먹을 수 있고, 자고 싶으면 잘 수도 있고.”
‘월인’은 고전, 현대, 어학, 영화, 연극 등 인문학을 위주로 지금까지 1500여종(이 중 연극관련 200여종)의 책을 발간했다.
3. 연극과의 인연
‘연극과인간’이라는 출판사는 뭔가.
“2000년 수유동으로 사옥을 옮기면서 만든 자회사다. 양승국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만수 인하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극작가 이만희, 배우 김명곤 씨 등이 ‘연극과 인간’이라는 잡지를 만들려고 했으나 결국은 못 만들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자회사 이름으로 쓰게 됐다.”
국문학 서적을 주로 발행하던 ‘태동’ 때도 연극관련 책에 손을 댄 적이 있으니 연극과의 인연은 조금 더 올라간다.
‘연극과인간’은 2000년 이후 600여 종의 책을 발간했고, 연극관련 출판시장의 70~80%를 점유하고 있다. 질을 담보해 가며 짧은 기간에 이처럼 많은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박성복 대표의 연극에 대한 열정과 배려, 우수 저자의 확보, 직원들의 능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다양한 단행본을 발간하는 동시에, 여러 연극 단체의 역사를 정리하는 도서(국립극단 50년사, 한국현대연극 100년, 서울시극단 10년사, 현대극장 30년사 등)와 희곡작가 전집(이현화, 오태석, 이윤택, 이근삼 등)을 발간했고, 정기간행물(연극평론, 공연과이론)도 내고 있다. ‘월인’과 ‘연극과인간’이 낸 책 중 300여권이 문화관광부와 대한민국 학술원의 우수도서로 선정되면서 이들의 노력은 보답을 받았다.
그는 ‘연극과인간’이 얻은 명성에 꾸준히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한국극예술학회가 제정한 노정 김재철학술상을 2002년부터 2012년까지 11년간 후원했고, 여석기평론상도 2007년부터 시작해 수 년 전까지 후원했다. 한국연극학회의 신진논문학술상은 2002년부터, 극작가협회의 신춘문예희곡상은 2011년부터 지금까지 돕고 있다.
또 여석기 교수가 1970년 창간해 1981년까지 20호를 발간하고 정간했던 ‘연극평론’을 19년만인 2000년 복간할 때도 도움을 준 것이 박성복 사장이다. 복간 때부터 2010년까지는 무료로 인쇄를 해줬고, 2011년부터는 제작비만 받고 있다. 이 잡지는 현재 계간이다.
당연히 그는 연극인들을 많이 안다. 지인이 4000~5000명쯤 된다고 한다. 그래도 좀 더 친한 사람이 있지 않느냐고, ‘기자스러운’ 질문을 했다. 그는 대답을 주저했다. 계속 밀어붙이자 김석만, 김윤철, 김미혜, 신현숙, 서연호, 김미도, 홍창수, 김방옥 씨 등을 입에 올렸다. 그가 “섭섭해 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며 계속 이름을 말하려는 걸 “기자가 막아서 이름을 더 이상 얘기하지 못했다고 써주겠다”고 약속하고 넘어갔다.
4. 경계인의 고집
박성복은 스스로 연극도 경계인, 학문도 경계인이라고 규정한다. 연극과 학문을 사랑하고, 그 분야의 책을 내고는 있지만 정통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일종의 겸손이라고 할까.
그냥 겸손이 아니라는 게 그가 다른 사람과 다른 점이다. 그는 몇 가지 고집이 있다. 우선 싫어하는 게 꽤 있다.
“사옥에 간판을 크게 다는 것, 행사장 가서 사진 찍는 것, 감사패 받는 것, 명함에 직책을 잔뜩 박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서 받은 명함에 ‘사장’이나 ‘대표’라는 말이 없다. 그는 자기 책상도 따로 없고 컴퓨터도 쓰지 않는다. 그리고 예전에 찍은 사진을 몇 장 달라고 했더니 찾고 찾아 겨우 한 장을 보내왔다. 그가 이전에 인터뷰를 한 것도 딱 한 건밖에 찾지 못했다.
“이런 성격 때문에 손해도 많이 봤다. 그러나 내게는 원칙이 있다. 입찰할 때 절대로 로비를 하거나 리베이트를 안 준다. 반대로 인세는 정확하게 계산해서 준다. 나는 약자에게 약해지고 싶다.”
연극 관련 책은 희곡집, 평론집, 학술서, 연기서, 잡지, 번역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는 그 중에서도 희곡집을 좋아한다.
“가장 살아 있어야 하는 것이 창작이다. 원래는 공연한 희곡만 출판해 주는 게 원칙인데 수준이 웬만하면 다 찍어준다. 아쉬운 것은 예전에는 보통 1500부를 찍었는데 요즘은 500부만 찍는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전집류와 단행본을 합쳐 극작가 200여명의 작품집을 발행했다.
그러다 보면 손해를 볼 게 아닌가.
“손해? 초창기에는 손해를 많이 봤다. 그러나 5년 후부터는 흑자로 돌아섰다. 중요한 책은 이익이 안 나더라도 출판해주는 것이 맞다. 그런 책들은 후학들에게는 저본(底本)이기 때문이다.”
다른 출판인들은 박 사장을 어떻게 보느냐고 물어봤다.
그는 신화와 허명(虛名)이라는 말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신화적 존재라고 하는 것은 허명이다. 나는 가능하면 진실과 약자 편에 서려고 노력했고, 직원이 아니라 주인이라는 마음으로 일했을 뿐이다. 그래서 신뢰를 얻었다. 나는 말도 잘 못하고, 기술도 없다. 그저 발로 뛴 사람이다.”
‘주인정신’을 말하는 대목에서 몇 년 전 정치권에서 화제가 됐던 말이 떠오른다. 임제종 개조인 의현 스님의 말한 수처작주(隨處作主)라는 말로, 어디서나 주체적으로, 주인처럼 행동하라는 뜻이다.
그의 고집은 미래에도 살아있을 듯하다.
“언젠가는 출판사를 직원이나, 교수 출신에게 맡기고 싶다. 자식이 1남2녀인데, 그들에게는 집은 주겠지만 출판사는 주지 않기로 했다.”
그가 한 유일한 인터뷰(한국연극 2006년 4월호)에도 눈길이 가는 독특한 대목이 있다.
“‘연극과인간’ 직원들은 출퇴근 시간도 월급의 액수도 직원들 스스로가 결정한다. 대표인 그도 직원들의 월급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정직하게 충분히 분배해 가져간다는 것이다. 지금껏 직원들은 입사 후 한 명도 이동 없이 함께 해 오고 있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런 경영방침의 배경을 물어봤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이 시스템은 몇 년 전에 깨졌고, 직원들도 전부 물갈이를 했다고 한다.
“15년간 정말로 믿고 맡겼던 경리직원이 야금야금 상당액을 횡령한 것이 뒤늦게 드러났다.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모든 직원을 바꾸고 3년 전부터 그 시스템은 거둬들였다.”
그는 이 일로 상당한 충격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도 역시 사람이다.
지금 두 출판사의 직원은 영업, 관리, 경영, 디자인, 편집, 기획(겸임교수) 등 10명. 새로운 팀워크는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
그에게 한국 연극의 방향을 물어봤다.
“현장은 자생력을 길러야 하고, 정부는 지원은 하되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판에 박힌 질문을 했다.
앞으로 어떤 책을 내고 싶은가.
“상업적으로 성공을 하면서도 꾸준히 인용되는 책이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희곡집이든, 비평서든.”
나는 인터뷰가 끝났는데 그는 아직 안 끝난 것 같다.
“나는 자랑할 게 하나도 없어요.”
(*지난 2월부터 동아닷컴에 연재한 ‘심규선의 연극인 열전’을 박성복 사장의 인터뷰를 끝으로 마칩니다. 그동안 애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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