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는 1971년 8월 24일자 1면에 “23일 낮 경인가도를 피로 얼룩지게 한 난동 무장괴한들은 북괴 무장공비가 아니라 인천 앞바다 공군관리하에 있는 실미도에 수용 중인 ‘군(軍) 특수범’들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군 특수범은 군 복무 중 중죄를 저질러 군 교도소에 수감 중인 이들을 뜻한다.
박정희 정부는 이 사건이 일어난 전날에는 대간첩대책본부를 통해 “무장공비 21명이 서울 침투를 기도했다”며 “(인천에서 처음 발견된) 이들 무장공비들은 민간버스를 탈취 부평 소사를 거쳐 서울 노량진 유한양행 앞까지 진출했다 군경예비군에 의해 저지됐다”고 발표했다.
대간첩대책본부장이던 김재명 중장은 이날 “최근 남북적십자 간에 가족 찾기 제의와 호응이 오가는 사이 지난 16일부터 21일까지 닷새 동안 전 휴전선에 걸쳐 북괴가 24명의 무장공비를 다섯 차례 침투시켜 그 중 10명을 사살하고 아군 4명이 전사했다”며 ‘무장공비 서울 침투설’에 무게를 더했다.
이 발표가 어딘가 미심쩍었던지 당시 동아일보는 1면 머리기사 제목에 이들을 ‘무장괴한’이라고 표현했지만 제목부터 ‘공비’라는 낱말을 넣은 매체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군특수범이 아니었다. 예비역 육군 준장이던 이세규 신민당 의원(1926~93)은 이들이 공군 산하 무장특공대였다고 폭로했다. 정부는 이 의원의 입을 막아보려 했지만 사실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이듬해 ‘10월 유신’ 이후 이 의원은 한 해 동안 일곱 차례 연행돼 고문에 시달렸다.)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는 1971년 9월 16일 국회에서 이들이 군 특수부대 요원이라고 신분을 공개했다. 김 총리는 “특수범이라고 주장했던 정부의 말을 바꾼 것은 자유로운 매스컴 활동 등으로 우리의 한마디 한마디가 북괴 측에 알려지고 있는 점을 감안, 어느 시기 동안 특수범이라고 은닉 발표하는 것이 불가피했으나 이제 그 시기가 지났기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평상시나 전시(戰時)를 막론하고 어느 나라 어느 군대든 특수부대를 갖고 있다. 특수부대의 편성 목적, 시기, 훈련 과정 등은 공개회의에서 말할 수 없지만 국회 조사위원회에서 충분히 조사를 끝냈다”면서 “정치 목적으로 이 부대가 사용되지 않느냐는 의문에 대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북한은 박정희 정권에 위협이 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도움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만약 북한이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사건 첫날 박정희 정권은 이들이 누구였다고 발표했을까.
임지헌 서강대 교수(사학)는 이런 관계를 ‘적대적 공범자들’이라고 규정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북한 김일성이 서로 적대하면서도 도와주는 공범이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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