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유배지도 대명률에 따라 2000리, 2500리, 3000리의 세 등급으로 정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한양에서 조선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함경도 경원부까지도 1700리가 안 됐기 때문이다. 한국국학진흥원이 만드는 웹진 ‘담(談)’에 따르면 세종 시기에 각각 600∼900리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유배지의 거리를 가깝게 조정했다.
하지만 정조 때 횡령죄를 저지른 김약행에게는 3000리를 채워 집행해야 한다는 여론의 화살이 쏟아진다. 그래서 그의 유배 코스는 한양→기장(경상도)→평해(강원도)→단천(함경도)으로 한반도를 오르내렸다. 이른바 ‘곡행(曲行)’이다.
정조가 법이 정한 거리에 항상 엄격했던 건 아니다. 조선 왕릉은 임금이 하루 안에 다녀올 수 있도록 도성에서 80리 안에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융릉(현 경기 화성시)을 88리 떨어진 당시 수원에 만들었다. 그만큼 명당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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