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도서관]부부 간의 아득한 거리를 채우는 것은…‘아내의 이름은 천리향’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29일 16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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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정감과 가락이 돋보이는 서정시를 쓰는 시인 손택수 씨. 동아일보DB
따뜻한 정감과 가락이 돋보이는 서정시를 쓰는 시인 손택수 씨. 동아일보DB
《‘세상에 천리향이 있다는 것은
세상 모든 곳에 천리나 먼
거리가 있다는 거지
한 지붕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아내와 나 사이에도
천리는 있어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의
고단한 숨소리를 듣는 밤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아
네가 서러운 것은
진하디 진한 향기만큼
아득한 거리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지
얼마나 아득했으면
이토록 진한 향기를 가졌겠는가
향기가 천리를 간다는 것은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가
어디나 있다는 거지’

-손택수 시 ‘아내의 이름은 천리향’에서》

서향나무에 피는 꽃은 그 향이 천 리를 간다고 해서 ‘천리향’이라 부른다. 400㎞ 가까운 이 거리, ‘천리’가 방 하나에도 있다. 한 지붕 아래서 한 이불을 덮고 사는 아내와 시적 화자 사이의 거리다.

결혼한 남녀라면 누구나 공감할 터. 부부는 촌수가 없다지만 돌아서면 남이고, 이 양면성은 살 붙이고 사는 부부가 하루에도 몇 번씩 겪는 일이다. 곁에 누워 등을 돌리고 잠든 아내 혹은 남편이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밤은 적지 않다. 그때 아내 혹은 남편은 ‘방구석에 처박혀 핀 천리향’이 되고, 두 다리로는 건너가기에는 너무나 먼 거리, ‘살을 부비면서도/ 건너갈 수 없는 거리’를 어찌할 수 없이 가늠하게 된다.

그러나 천리향에는, 천리라는 먼 거리를 건너갈 수 있는 ‘향기’가 있다. 비록 물리적인 거리는 아득하다 해도, 넓게 퍼져가며 그 거리에 닿을 수 있는 향기는 진하다. 아내와 시적 화자 사이에 놓인 먼 거리를 가는 ‘이토록 진한 향기’는 ‘시간’과 ‘기억’의 다른 말일 것이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켜켜이 쌓이는 시간, 그 시간 속에서 공유하는 기억들이 천 리라는 아득한 길을 채워준다.

김지영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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