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63)는 일본계 영국인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영국으로 건너온 그는 영국에서 자라고 공부하며 작가가 됐다. 그는 현재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들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는 사람 중 한 명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왜곡되거나 망각될 수 있는 기억의 여러 가능성을 포착해 인간과 문명에 대한 비판을 예리하게 담아냈다. ⓒJeff Cottenden
1982년 첫 소설 ‘창백한 언덕 풍경’을 발표하자마자 주목받기 시작했고 세 번째 소설 ‘남아 있는 나날’(사진)이 맨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나를 보내지 마’ 등 다양하고 개성 있는 작품을 선보이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역시 그의 대표작은 ‘남아 있는…’이고, 그는 이 작품의 작가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남아 있는…’은 고전적 품격과 깊은 주제의식을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로 써 내려간 작품이다. 20세기 전반 영국을 배경으로 고귀한 인품을 지닌 달링톤 경을 모시는 충직한 집사 스티븐슨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달링톤 경이 훌륭한 귀족 신사의 모범이라면 스티븐슨은 최고 수준의 집사라 할 수 있다. 스티븐슨은 ‘위대한’ 집사가 되고자 절제와 근면, 헌신을 다한다. 사랑의 접근도 불허하고 아버지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건 쓸쓸함과 회한뿐이다. 달링톤 경의 고귀한 선의가 결과적으로 나치를 돕는 엄청난 정치적 실수를 하게 되면서 달링톤성의 영광도 끝난다. 스티븐슨은 옛 영광과 사랑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젊은 날 사랑했던 여성인 켄턴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이는 아득한 기억 속에 존재했던 일일 뿐이다.
이 작품은 한 집사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단조로운 이야기다. 그러나 그 단조로움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시대와 삶에 관한 문제들이 무겁게 출렁인다.
평화와 우의를 위한 고귀한 노력이 전쟁과 야만을 돕는 결과를 초래한 달링톤 경의 아이러니는 그 자체로 역사의 아이러니이자 귀족 사회에서 대중 사회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기도 하다. 스티븐슨의 삶 역시 견고하게 지켜온 것이 무너지고 곁에 있는 것을 외면하다 뒤늦게 찾아 나서면 사라져 버리는 아이러니 속에 있다.
스티븐슨이 지키려 애쓴 숭고하고 맹목적인 충직함의 가치는 변화하는 세상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질문을 던진다. 민주사회에서 중요한 문제를 어떻게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만든다.
개인에게도 묻는다. 위대함이란 가치는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해진 덕목일까? 귀족뿐 아니라 하인이나 평민도 위대함을 추구할 수 있을까? 개인의 삶을 포기하는 충직함이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거대한 질서나 주어진 임무에 충성하는 것보다 개인의 삶과 주장을 우선하는 것이 소중한 가치일까?
‘남아 있는…’은 시대와 삶에 대해 실로 많은 물음과 이야기를 담고 있는,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소설이다.
고전적 품격을 지닌 소설에 대한 품위 없는 사족 하나. 세계 최대 서점 아마존의 소유주이자 세계적인 부호인 제프 베저스는 ‘내 인생 최고의 완벽한 소설’로 ‘남아 있는 나날’을 꼽았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문학평론가
○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태어나 1960년 영국으로 이주했다. 영국 켄트대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스트앵글리아대에서 문예창작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표작 ‘남아 있는 나날’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앤서니 홉킨스, 에마 톰슨이 출연하는 동명의 영화(1993년)로 만들었다. 영국 등 유럽의 색채를 녹여낸 작품과 함께 일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을 선보였다. 원폭 후 일본의 황량한 풍경을 그려 전쟁의 상처를 드러낸 ‘창백한 언덕 풍경’, 전쟁을 찬양하는 그림으로 부와 명예를 누리다 종전 후 비난받는 노(老)화가를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을 그린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가 그렇다. 음악을 매개로 일상적 삶의 본질을 통찰한 ‘녹턴’은 젊은 시절 싱어송라이터를 꿈꿨던 저자의 음악에 대한 내공을 확인시켜 준다. 1995년 대영제국 훈장(OBE), 1998년 프랑스 정부가 주는 문화예술공로 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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