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 여름 여행길에 비가 내렸다. 뜨거운 햇살에 눈살 찌푸리지 않아서 좋고, 나무와 강 건너 먼 산이 물기로 촉촉히 적셔져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볼 수 있으니 운이 좋은 날이다. 강 따라 걸을 일도 많고, 산 사이로 난 숲길과 정원, 미술관을 야무지게 찾아가기로 마음먹은 이번 양평 여행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 길에 알베르토 몬디가 선뜻 따라나섰다. 등산과 여행을 즐기고 한국에 머문 10년 동안 어지간히도 부지런하게 쏘다녔던 그. 글쎄, 양평이 이탈리아 고향 마을인 미라노(Mirano)에서 멀지 않은 코넬리아노와 아주 닮았단다. 이국땅에서 제 고향 마을을 떠올렸다는 이 흥미로운 친구와의 양평 여행이 평소와 다른 기대감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물과 꽃을 마주해 마음을 씻다 세미원
여름 양평 여행에서 세미원을 빠뜨린 적이 없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가 가까워질 즈음부터 가늠되는, 강물을 뒤덮은 연잎의 군락은 언제 봐도 가슴 뛰는 풍경이다. 그 초록 연잎들을 길잡이 삼아 들어서는 세미원에서 두물머리를 낀 18만㎡의 땅과 물, 9개의 연못마다 연꽃이 가득 피어 있다. 연꽃과 일일이 눈맞춤 하며 하루를 통째로 덜어 써도 모자란 곳이 여름의 세미원이다. 새벽 내내 공기에 묻어 있던 희미한 물기운을 고이 모아 이것 보라며 송글송글 맺어놓은 잎이 기특하다.
연꽃잎은 수묵화의 붓과 같아서 물을 머금어 올리듯 농도를 점점 달리한 분홍과 노랑의 매혹적인 그러데이션을 완성한다. 화려한 시절 다 지나더라도 두툼하고 튼실한 연밥을 선사하며 제 한해살이를 접는다. 연잎을 고이 싸향 그윽하게 지어낸 밥은 평생 질려본 적 없는 호사였다.
여행을 좋아해 웬만한 한국 사람보다 더 구석구석 부지런히 다녔고 연꽃으로 이름난 마을들도 막힘없이 척척 입에 올리는 알베르토는, 두 개의 강이 흘러드는 물길을 따라 초록의 자락을 너르게 펼쳐낸 세미원의 연밭은 처음이라며 눈을 떼지 못한다. 세미원의 연못을 거닐다 문득 생각나 들려준 옛이야기에 그는 환한 눈빛과 큰 웃음으로 대답한다.
“어렸을 때 비가 오면 저 연잎을 따다 우산처럼 쓰고 뛰어다니기 일쑤였어요. 그렇게 완벽하게 방수되는 우산이 또 어디 있을라고!”
사람과 교류하는 자연과 예술 들꽃수목원과 양평군립미술관
남한강 바투 낸 강변이야기길을 따라가다 나무와 꽃의 손짓이 심상치 않아 길을 벗어났다.
강과 그 너머 먼 산에 한눈 팔고 걸어가기도 지루할 틈이 없는데 불쑥하고 소담스런 카페 하나 눈에 들어오고, 어느새 정감 넘치는 정원 곁을 지나기도 하는 양평이란 걸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강변에서 우연처럼 만난 들꽃수목원은 유난히 비가 잦았고 뜨거운 여름을 보낸 덕분인지 수목의 초록과 야생화, 허브가 흐드러져 꼭 잔칫집 찾아온 기분이다. 그렇지만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소소한 산책이 좋고, 길가에 핀 작은 꽃 한 송이도 들여다볼 수 있는 마음이라면 즐길 자격 충분하다. 발 도장 찍듯 부리나케 찾아와 휘휘 둘러보는 눈에는 뭐 하나 걸릴 것 없는 그런 수목원이다.
길은 이어져 양평군립미술관에서 또 한 번 다리 쉼을 한다. 전시된 작품은 젊고, 그 수준은 심상찮다. 아이들의 예술 체험에 공을 들이기로도 유명하다. 인구 비례로 따져 예술인 수가 가장 많고 미술관·박물관 많기로 유명한 양평에서 속 제대로 채우고 사람들 맞이하는 곳이다.
시계를 천년 전으로 맞춰 닿은 고찰 용문사
잠시 1천1백 년이라는 시간을 뒷걸음질한다. 사람이 헤아리지 못할 시간을 껍질에 아로새긴 소나무와 잣나무, 참나무가 우거진 숲 사이에 가부좌 단정히 튼 용문사로 오르는 시간 여행이다. 비에 젖어 더 묵직하고 풍성해진 용문산의 운무가 동행해주었다.
913년 신라의 대경대사가 창건하고 조선의 세조가 특히 아꼈다는 용문사는 산속 깊이 안긴 고립감이 있어 오랜만의 적요로움에 빠져들게 했다. 1천 년, 누군가는 1천5백 년이라고까지 가늠하는 용문사 은행나무는 그 웅장한 몸집에 진초록 잎을 풍성히 두르며 여전히 ‘동안’임을 과시한다. 올가을에도 입이 딱 벌어질 노란 단풍으로 용문사 경내를 뒤덮을 것이다.
산속 고찰과 마주한 그의 시선이 궁금해 둘러봐 찾으니, 알베르토는 지장전 문틈 사이로 고개를 차마 다 들이밀지 못하고 숨죽인 채 한참 바라보고 있다. 그의 시선과 지장보살 사이, 법당 안 누군가의 합장이 깊고 오래 이어진다.
“유럽인들에게 불교와 절은 종교를 떠나 신비로움과 품위를 갖춘 이미지로 다가와요. 그런데 용문사는 깊고 아름다운 산 중의 고요함까지 있어 말로 다할 수 없이 감동적이에요.”
물과 나무의 위로와 치유를 남겨놓은 카페 수수
기대 없이 나섰다가 미소가 절로 머금어지는 만남에 머물기 일쑤이니, 양평 여행은 시간 가늠이 까다롭지만 늘 즐겁다. 물래길 따라 걷다 북한강 철교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저만치 두었을 즈음 너른 정원의 카페 앞에 걸음이 멎었던 순간도 그랬다. 소박하고 단정하되 섬세한 손길이 묻은 카페 수수(水樹). 카페이자 갤러리이고, 가까운 이들과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고, 때론 그 강과 산을 배경으로 예술가의 작은 공연이 열리는 무대로도 두루 쓰이는 수수다. 그런데 이 드러난 구실들 이전, 카페 수수가 태어난 애초의 사연에는 ‘치유’의 배려가 담겨 있다.
그림을 마주하고, 커피 한잔을 손으로 감싸쥐어 강물(水)을 마주하거나 따라 거닐고, 정원 가운데 듬직한 느티나무(樹) 앞에 서 있는 사이 마음에 가두었던 앓음과 바윗덩이처럼 가라앉은 기억들을 부려놓고 흘려두고 가는 곳. 그렇게 강과 산과 나무가 사람들을 보듬고 달래고 비워주며 치유하는 곳이라 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야전병원이 자리해 부상병을 돌봤다는 이야기는 평행이론처럼 절묘하게 이어진다. 혹시 이곳을 찾았을 때 누군가 정원의 느티나무를 꼭 끌어안고 한참이나 아무 말 않고 있다면 모른 척 북한강 저 먼 물결로 시선을 두어도 좋을 것 같다.
예술과 인연으로 행복해진 여정 이재효갤러리
도착하기까지 유난한 설렘으로 들뜨는 마음을 남몰래 가라앉히고 있었다. 빗줄기는 드세졌지만 이 만남을 기다린 시간을 떠올리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요즘 미술계에서 단연 인기 있는 작가로 손꼽히는 이재효의 갤러리 겸 작업실로 찾아가는 길이었다.
이재효갤러리에서 두 눈으로 보고도 쉬 믿기 힘든 매혹적인 조형미에 빠져들었다. 나뭇잎이나 나무줄기, 통나무, 나무토막, 까맣게 숯이 된 목판, 못 등의 요소들이 한데 모였다가 깎이고 잘려지며 새로운 덩어리와 곡선과 선, 글자로 완성된다. 그 수백의 재료들을 조형으로 완성하기까지의 노력은 뜨겁고 치밀하고 가슴 벅차다. 갤러리 한켠에서 알베르토가 낮은 탄성을 내며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양평 여행이 좋은 건 갤러리가 많아서이기도 해요. 그렇지만 이렇게 매혹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경험한 갤러리는 어느 나라에서도 흔치 않았어요. 들여다볼수록 점점 더 빠져드는 기분이에요.” 더없이 행복한 오후의 갤러리다.
양평이 풀어놓은 푸짐한 이야기 양평 체험 여행
여행은 그곳에서 얻게 될 것들에 마음이 부풀어 오르지만 양평은 여행을 다녀온 뒤를 더 기대하게 한다. 이야기가 푸짐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친구들 모아놓고 양평에서 본 산과 강과 숲을 들려주고, 싸 들고 온 음식을 부려놓으면 이야기도 그만큼 차려진다. 그러면 그 이야기에 홀려 친구들은 양평으로 달려간다.
이번 양평 여행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그리운 이와의 만남이 있었고, 강과 산을 오가는 사이 깊은 치유를 경험했으며, 사람의 손길로 더욱 아름다워진 자연의 이야기를 꾹꾹 눌러 담아 가득 챙겼다. 그 옛날 강원도로 넘어가던 철길이었음을 아스라이 떠올리게 하는 레일바이크를 아이들 덕분에 모처럼 부끄럼 무릅쓰고 즐길 수 있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미술관이 놀이터가 되고 예술이 일상의 배움이 되어가는 모습도 양평에서 만났다. 산자락 하나를 빌려 정원을 가꾸고, 그 정원의 산책이 끝나갈 즈음이면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될 R401에서 첨단 통신 기술과 ‘제 꼴 찾기’의 절묘한 조합을 경험했다.
그 많은 숲과 카페와 갤러리와 강변의 평화로움을 다 챙겨 담을 순 없지만, 그럼에도 양평은 언제나 오래전 종합 선물 상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 상자를 뜯어보고 맛보고 싶어 안달 나던 시절의 추억. 생각만 해도 달려가 들여다보고 만나고 싶어 마음이 달아오르는 양평도 그러하다.
양평의 맛
양평의 맛을 두고 뭐라 딱 범위를 정하기란 힘들다. 청정 자연에서 유기농 재배로 얻은 신선한 제철 재료는 정직한 맛의 유일한 비법이 되었고, 서울 도심의 유명 카페들을 졸지에 하수로 만들어버리는 탁월한 솜씨의 빵과 다과, 커피도 양평에 있다. 먹으러만 양평 간다고 해도 말릴 재간이 없다. 아니, 그 또한 양평을 추억하는 꽤 좋은 핑계가 되어줄 거라고 토닥거려주겠다.
용문천년시장 5와 10으로 끝나는 날마다 용문역 앞에 2백 개가 넘는 좌판이 펼쳐진다. 양평군 3대 전통 시장으로 꼽히는 이곳에서 산더덕이며 제철 과일, 장터의 다양한 간식들을 맛봤다. 사람 살아가는 모습을 만나는 걸 여행 중 최고의 경험으로 친다는 알베르토가 양평 여행에서 가장 즐겼던 곳이기도 하다.
친환경 쌈밥_민들레 식당 도시 생활 접고 가족들과 양평에 정착한 전직 방송작가는 청정한 자연의 로컬 푸드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 관심은 텃밭과 주변 농가에서 손수 재배한 채소에 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레시피를 더해 근사한 친환경 쌈밥 밥상을 차려내게 했다. 쌈과 함께 내는 돼지 숯불구이와 주꾸미 직화구이 양념은 인상적이다.
떡_클라라의 떡&커피 30년 된 방앗간 옆에 주인 내외의 딸은 카페를 열었다. 그리고 양평 여행자들이나 자전거 라이더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져 맛 명소가 되었다. 방앗간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든 떡과 커피의 조합이 꽤나 매력적이다.
연잎밥 정식_육콩이네 연꽃 풍성하게 피어 오르고 연잎 너르게 피어난 두물머리를 지나며 연잎밥 한 그릇 떠올려보지 않을 재간이 있을까? 두물머리와 세미원 주변에 많은 연잎밥 식당이 있고, 저마다의 솜씨와 사연으로 유명하다. 6남매를 슬하에 둔 선친이 지은 이름을 2대째 쓰고 있는 ‘육콩이네’는 정갈한 찬과 연잎 그윽하게 제대로 차려내는 밥상으로 인기 있다. 돌솥연잎밥은 먹고 난 뒤 누룽지가 특히 별미라고 소문났다.
양평 선지해장국_용문 장터 제아무리 두 손 가득 용문장을 봐왔다 하더라도 양평 해장국밥 한 그릇 챙기지 못하고 왔다면 헛수고가 아닐까 싶다. 조선시대부터 유명했던 양평 한우의 선지와 내장으로 끓여낸 양평 해장국은 멀리서도 부러 찾아가 맛보는 별미다. 한양 도성까지 소문이 파다했다는 그 주인공이 선사하는 얼큰함이 있어 양평에 또 한 번 반한다.
오하나베이커리와 행복한 뜰 많은 솜씨 좋은 요리사들이 양평에 터를 잡았고, 자연 경관과 솜씨가 어우러진 덕분에 명소가 된 곳이 많다. 발효종을 이용해 건강한 빵을 만드는 ‘오하나베이커리’와 너른 정원에서의 여유로움 속에 브런치를 즐기는 ‘행복한 뜰’은 이번 여행에서 알게 된 행운 같은 공간이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에서 운영하는 국내 여행 정보 포털 사이트. 추천 테마 여행, 관광 명소, 교통, 숙박, 맛집 등 지역 관광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한다. 제작지원 한국관광공사 진행 최은초롱 기자 글 남기환 사진 김성남 기자 조영철 기자 홍태식 디자인 김영화 취재협조 양평군청 헤어&메이크업 에스휴 스타일리스트 류시혁 어시스트 이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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