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12월 개장한 삼풍백화점은 지상 5층, 지하 4층의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1995년 6월 29일, 그날, 에어컨디셔너는 작동되지 않았고 실내는 무척 더웠다.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언제 여름이 되어버린 거지. 5시 40분, 1층 로비를 걸으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5시 43분, 정문을 빠져나왔다. 5시 48분, 집에 도착했다. 5시 53분, 얼룩말 무늬 일기장을 펼쳤다. 나는 오늘, 이라고 썼을 때 쾅, 소리가 들렸다. 5시 55분이었다. 삼풍백화점이 붕괴되었다. 한 층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은 1초에 지나지 않았다.’
-정이현 소설 ‘삼풍백화점’에서 ‘삼풍백화점’(2005년)이라는 소설은 제목이 가리키는 그대로 삼풍백화점에서의 시간을 주요 소재로 삼았다. 삼풍백화점은 안전불감증의 대표 격이자 한국 사회의 상처였다. 2년 뒤 다가올 IMF 사태의 예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강남 한복판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백화점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이다.
소설의 화자는 20대 여성이다. 그는 안락한 대학 생활을 보냈지만 사회인으로 진입하는 문턱이 높아 막막하다. 졸업식 때 입을 옷을 사려고 들른 삼풍백화점에서 그는 고교 동창 R을 만난다. 화자는 고교를 졸업하고는 매장 직원으로 일하는 R과 교류하면서 사회에서 낙오된 ‘취준생’으로 매일을 견뎌가지만, 하루 동안 아르바이트로 일했던 R의 매장에서 ‘고객’에게 실수를 거듭하면서 R과 멀어진다. 취업에 성공하고 새 남자친구와 평범한 데이트를 하던 어느 날, 자신이 막 들렀다 나온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마도 R이 계속 일하고 있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한 ‘나’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취직한 R. 삼풍백화점 근처에 살고 있는 나와 남산이 보이는 옥탑방에 살고 있는 R. 두 사람이 공통되게 갖고 있는 것은 ‘삐삐’. 1990년대 초반 젊은이들이 공유했을 소통 수단이다. 이 새롭고도 쾌활한 기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는 듯하지만 종내 그 간극은 좁혀질 수 없음을 소설은 보여준다.
이 소설은 1990년대를 20대를 경험한 이들에게 애틋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그때는 화려함으로 한껏 부풀었다가 이내 무너진 시간이었다.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 잇달아 눈을 붙잡았지만 마음의 허기짐을 채우긴 쉽지 않았다. 눈과 마음의 간극은 2000년대 들어 조금은 좁혀졌을까. 더욱 커지는 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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