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조선으로) 왔다. 그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었다. 본진의 뒤를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들였다. 새끼로 목을 묶은 후 여럿을 줄줄이 옭아매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몽둥이로 두들겨 팼다. 지옥의 아방(阿房)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아들여 괴롭히는 것이 이와 같을 것이다.”(‘朝鮮日日記’, 1597년 11월 19일)
왜군의 종군의승(從軍醫僧)인 게이넨(慶念)은 조선인들을 원숭이처럼 묶은 뒤 우마(牛馬)를 끌게 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게 하면서 볶아대는 일본 상인들의 행태를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다고 기록했다. 정유재란 발발 첫해 초겨울, 호남을 비롯한 대부분의 남부 지방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진 때였다.
조선은 당시 일본 상인들에게는 엄청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의 시장이었다. 왜군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상인들은 군량과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한편으로 사람 매매에까지 손을 댔다. 특히 사람 장사는 최고의 이문이 남았다.
상인들에게 조선인을 파는 주체는 왜군이었다. 전쟁 이전 왜구들이 조선 해안지역을 침탈해 조선인을 잡아가 일본에서 강제 노역을 시키던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달랐다. 왜군은 조선인을 잡으면 현지에서 일본인 인신매매상에게 팔아넘기거나 일본으로 끌고 가 평생토록 노비로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전쟁 도시인 나고야성은 조선인 포로들로 넘쳐났다. 정유재란 때 칠산도에서 왜군에게 붙들려간 정희득은 “귀국 도중 들른 나고야성에서 마주치는 사람 중에 반 이상이 조선인이었다”(‘月峯海上錄’)고 기록했다.
조선인 노예들의 고혈로 흥청거린 군사도시
기자는 지난주 일본 규슈 서북단 사가(佐賀) 현 가라쓰(唐津) 시의 나고야성(아이치 현의 나고야성과 구별해 히젠나고야성이라고도 함)을 찾았다. 가라쓰는 일본인들이 중국을 가리키는 표현인 ‘당(唐)’으로 가는 ‘나루(津)’라는 뜻으로, 예전부터 대륙을 오가는 항구였다. 이곳에서 부산까지는 해로로 278km 남짓이다. 왜군의 출병 거점지이자 전선 사령부인 나고야성이 세워진 배경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2년 불과 5개월 만에 이 성을 완성했다. 면적은 약 17만 m². 히데요시가 평생의 역작으로 지은 오사카성 다음 가는 크기였다. 그는 전쟁 초기에 나고야성 천수각에 머물면서 명령을 내렸다. 성 주변의 반경 3km 내는 일본 각지에서 차출된 다이묘(大名·영주)들의 진영으로 북적거렸다. 다이묘들은 이곳에서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고 조선으로 치러 가고, 이곳으로 귀환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통틀어 20만 병력이 나고야성에서 조선으로 출병했다. 지금도 당시의 진영 터에는 성벽과 토루 등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
나고야성에서 나고야포(만)로 이어지는 바다까지의 들판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인구 10만을 넘어서는 군사도시가 형성됐다. 조선에서 비참한 살육과 납치가 벌어지고 있는 동안 히데요시는 황금다실(黃金茶室)에서 금으로 된 찻잔에 따른 차와 함께 유흥을 즐겼다. 성내에서는 일본 전통의 가면극 노(能)와 노래 렌가(連歌)가 공연되는 등 불야성을 이루었다.
나고야성으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은 일본 내 각 다이묘들의 영지로 끌려가거나, 당시 국제무역항이던 나가사키로 옮겨져 노예로 팔려나갔다. 일부 다이묘들은 처음부터 조선인들을 노예로 팔 요량으로 나고야성 남쪽의 나가사키 항으로 곧장 입항하기도 했다.
포르투갈까지 개입한 국제 노예거래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노예로 파는 데는 포르투갈인들이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전 세계 노예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사냥으로 악명이 높았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의 사주를 받은 일본인들은 조선인 납치를 일확천금의 기회로 생각했다.
“전진(戰陣)의 (왜군) 제장(諸將) 가운데 약삭빠른 자는 처음부터 인신매매를 목적으로 조선인들을 대량 노략질해오기도 했다. (노예시장으로 흥성했던 나가사키의) 일부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붙잡아오기 위해 조선으로 도항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은 조선 남부 등 각지를 찾아다니며 남녀를 막론하고 조선인을 직접 사들여 나가사키 등지로 끌고 가 포르투갈 상인에게 철포(조총)나 비단을 받고 팔아넘겼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심지어는 포르투갈 상인이 조선에 들어와 직접 거래했다고 볼 수 있는 자료도 있다. 포르투갈 상인들이 왜군이 조선 남부 지방에 주둔하고 있을 때 일부러 현지에 인매선(人買船·노예매매선)을 보내 조선 포로를 직접 수용했다는 기록(1598년 9월 4일, 日本耶蘇會 宣敎聖職者會 報告)과,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의 비변사가 심문한 포로들 중에 포르투갈 상인 조앙 멘드스, 남만계 흑인 1명 등도 있었다(1604년 6월 22일, ‘등록유초’)는 공초 기록이다.
일본의 국제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와 히라도(平戶) 등지에서 매매된 조선인들은 홍콩, 마카오, 마닐라를 비롯해 인도, 유럽에까지 팔려나갔다.
“놀라울 만큼 많은 조선 포로가 일본으로 송치돼 주로 나가사키 방면에서 팔렸다. 포르투갈 상인은 이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耶蘇會宣敎師の朝鮮俘擄救濟敎化’)
돈이 되는 인신매매에는 기리시단(가톨릭) 다이묘들도 적극 개입돼 있었다. 당시 유럽 선교사들이 인신매매에 개입한 가톨릭 다이묘들의 파문을 결정할 정도로 대규모로 행해지고 있었다. 다이묘와 병사들 할 것 없이 조선인 노예 획득과 매매에 열을 올렸으니 정유재란은 노예전쟁이기도 했다.(‘壬辰·丁酉倭亂時 朝鮮俘虜奴隸問題’)
넘쳐나는 조선인 노예들로 인해 전 세계 노예시장의 가격이 하락할 정도였다. 조선인 부녀자와 아이의 경우 한 명 가격이 당시 일본의 화폐 단위로 약 2∼3문 정도였다. 조총 1정 값은 120문이었다.
1598년 3월경 당시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상인 프란치스코 카를레티는 “조선에서 남자와 여자, 소년과 소녀 등 나이를 가리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왔다. 이들은 모두 극히 헐값에 노예로 팔려나갔다”(‘나의 세계 일주기’)고 기록했다.
카를레티는 12스쿠도(scudo·포르투갈 옛 화폐단위·일본 화폐로는 약 30엔)를 지불하고 조선인 5명을 사들였다. 카를레티는 이들을 나가사키의 예수회 교회에서 세례를 받도록 한 뒤 인도로 데려가 4명을 풀어주고, 나머지 한 명은 이탈리아 플로렌스(피렌체)까지 데려가 자유인으로 방면했다. 카를레티는 그 한 명이 로마에 있을 것이며, 이름이 ‘안토니오’로 알려져 있다고 기록했다. 이후 안토니오는 로마에 정주하면서 교회 일에 종사하다가 화가 루벤스의 눈에 띄어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의 그림 모델이 됐다고 한다(그림 속 모델이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라는 등 여러 이설도 있다).
동포를 상대로 총칼을 들어야했던 조선 청년들
조선에서는 왜군에게 끌려간 민간인들을 피로인(被虜人)이라고 불렀다. ‘사로잡힘을 당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군은 피로인을 병력 보충용으로도 이용했다. 주로 남자아이나 젊은 청년이 그 대상이었다.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이들은 모국의 군사들과 싸울 정예병으로 길러졌다.
“임진·계사(壬辰·癸巳·1592-1593년)에 우리나라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가서 이제 장성한 나이가 돼 정용(情勇)하고 강한(强悍)하기가 본시 일본군보다 나은데, 정유(丁酉·1597년) 재침 때 이들 중에 적을 따라 온 자가 무척 많았다. 그런데 본국(조선)으로 도망해 오는 자는 적고 적국(일본)으로 도로 도망간 사람이 많았다. 또한 조선 남자로서 전후에 잡아온 자가 포 쏘기도 익히고, 칼 쓰기도 익히며, 배 부리는 것도 익히고,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强壯)하고 용맹하기가 진짜 왜놈보다 낫다.”(‘月峯海上錄’)
1597년 왜장인 가토 기요마사 진영을 탐정(探偵)한 사명대사는 “가토의 진영에 15∼16세 되는 나이 젊고 정예한 자는 조선 사람으로 군세가 종전에 온 적과는 다르다”고 하며 “일본 대군이 들어오기 직전에 결전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선조실록’)
정유재란 시기에도 어린아이들이 많이 잡혀갔다. 그중에는 1597년 8월 남원성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장군의 아들도 있었다. 전라병마절도사 이복남의 셋째아들 이성현(李聖賢·우계이씨 족보에는 慶寶로 표기)의 경우다. 이성현은 당시 7세의 나이에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갔다. 이후 그는 ‘리노이에 모토히로(李家元宥)’로 개명하고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 4녀를 두었다고 한다. 리노이에 가문은 에도시대 이후 조선이씨(朝鮮李氏)로 불리면서 이복남의 혈통을 이어갔다.(‘羽溪李氏 族譜’)
일본 아사히신문 출판국장과 아사히학생신문사 사장 등을 역임한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1998년 작고) 씨가 바로 리노이에 가문의 후손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뿌리를 찾던 그는 1982년 한국을 찾아 선조들의 사적지와 묘소를 참배하고 돌아갔다.
여성들은 노동력 착취에 이용돼
여성 피로인들은 주로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노동 인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 조선에서는 곡물 운송을 하거나 면화나 화곡을 거두어들이는 단순 노동에 주로 투입되었다. 일본으로 끌려가서는 다이묘의 집안 노비나 하녀가 돼 죽을 때까지 비참한 생활을 했다. 미모와 재능이 출중하거나 신분이 높은 여성의 경우, 지배층의 부인(夫人)이나 첩(妾)이 되기도 하였다.(‘임진왜란에 납치된 조선인의 일본 생활’)
정유재란 시기 조선인 납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한국 학계에서는 10만 명 규모로 보는 반면, 일본 측은 처음에는 5만∼6만 명으로 추정하다가 현재는 2만∼3만 명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본 측 주장은 역사적 기록에 비춰 터무니없이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1617년 경상도겸사복(慶尙道兼司僕) 정신도가 피로인 전이생(全以生)의 서한을 소개하는 상소문에서는 “전이생과 같은 처지로 사쓰마(薩摩)에 잡혀 있는 피로인이 3만700여 명이나 되는데, 별도로 한 구역에 모여 산 지 장차 24년이 되어간다”(‘광해군일기(정초본)’)고 기록되어 있다. 전이생이 밝힌 숫자가 다소 과장일 수 있으나, 한 지역에만도 3만 명이 넘는 피로인이 있다는 기록은 당시 피랍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은 피로인을 고국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그러나 실제로 돌아온 수는 공식적으로 5000∼700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돌아온 이가 적은 이유는 일본 측의 비협조, 조선 조정의 어정쩡한 피로인 대우 정책 등을 꼽을 수 있다. 피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서도 죄인처럼 차별과 멸시를 받았다. 천민 출신은 돌아온 뒤에도 천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귀환한 양반들도 대부분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 재야에서 살아가야 했다. 조선은 일본으로 끌려간 자체를 절의(節義)를 잃은 것으로 곱지 않게 보았던 것이다.
기자는 나고야 성터 높은 곳으로 올라가봤다. 멀리 만을 낀 바다가 펼쳐졌다. 7주갑(周甲·1갑은 60년으로 420년) 전 조선에서 침탈해온 노예들과 재물을 깔고 앉아 흥청거렸을 도시는 들판으로 변해 한가로워 보였고, 잔잔한 바다는 평화로워 보였다.
나고야 성터에 있는 나고야성박물관은 공식 안내문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잘못된 침략 전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무고한 양민의 코를 베고, 짐승을 사냥하듯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포획해 노예로 팔아넘긴 세계 전쟁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극악한 전쟁범죄에 대한 설명으로는 너무도 미약한 표현이지만, 그나마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본 내 몇 안 되는 전시 기관 중 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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