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1956년(대약진 운동 전)에 서거했다면 그는 틀림없이 중국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그가 1966년(문화대혁명 전)에만 서거했어도 뛰어난 공이 조금 빛이 바랠지언정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1976년에 서거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덩샤오핑(鄧小平·1904~1997) 중국 최고지도자는 1981년 이렇게 말했다. 그가 이렇게 평가한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 중국 초대 주석이었다. 41년 전 오늘자(9월 10일) 동아일보는 바로 마오쩌둥이 세상을 떠난 소식을 전했다.
역사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영웅인 동시에 1950년대 대약진 운동으로 수천만 명을 굶어죽게 만들고, 문화대혁명으로 중국 문화를 퇴보시킨 독재자였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덩샤오핑 시대에 등장했던 표현이 바로 ‘공7 과3(功七過三·공이 7할, 잘못이 3할)’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가 내리막길을 걷게 된 배경 중 하나가 6·25전쟁이다. 전쟁 중반 미군을 비롯한 유엔군이 북상하자 마오는 “순망치한(脣亡齒寒·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을 외치며 “중국 본토에서 미군과 싸우는 것보다 한반도에서 싸우는 게 낫다”면서 ‘인민지원군’ 60만 명을 파병했다.
마오쩌둥이 ‘인민해방군’이라는 공식 명칭 대신 파병 부대에 이런 이름을 붙인 건 중국 정부가 유엔과 직접 맞서는 모양새를 피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다. 안세영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6·25전쟁) 참전 후유증을 가장 오래 겪은 나라는 아마 중국일 것”이라며 “국제사회에서 침략자라는 낙인을 피하지 못했고 중국은 죽(竹)의 장막에 갇히다 보니 극단적인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과오를 범했다”고 평가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제대로 국가를 발전시킬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한국으로서는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경제사학자 중에서는 중국이 문화대혁명(1966~76년)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당시 한국이 경제 발전을 이루기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분석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마오쩌둥은 한국인들에게도 6·25전쟁 당시 북진 통일을 실패하게 만든 원흉인 동시에 경제 발전을 도운 ‘도우미’였던 셈이다.
6·25전쟁은 마오쩌둥 가족에게도 불행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참전했던 큰아들 마오안잉(毛岸英·당시 28)이 1950년 11월 25일 평북 삭주군에서 미군기 폭격을 받아 숨졌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도 평북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부 열사릉원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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