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기는 유치하다. 얼마 전 술에 취해 터벅터벅 집에 가던 길. 목이 말라 편의점에 들렀는데, 점원이 눈을 사로잡았다. 아르바이트 학생일 듯한데, 한쪽 팔에 문신이 빽빽하게 들어선 게 아닌가. 침이 꼴깍 넘어가는데, 그의 손에 들린 두툼한 책 한 권에 또다시 눈길이 꽂혔다. 맞다. 미국 캘리포니아대의 재러드 다이아몬드 교수가 쓴 그 책이었다.
집에 돌아와 한참을 뒤졌더니, 곰삭은 종이 냄새가 밴 ‘고서(古書)’가 주인을 맞았다. 반가운 마음에 몇 장을 넘겼는데…. 어라, 매캐할 정도로 내용이 깜깜하다. 분명 읽긴 했었는데. 괜스레 ‘타투인(人)’에게 질투가 피어올랐다.
마침 찾아보니 ‘총, 균, 쇠’는 올해 출간 20주년을 맞았다. 스무 해 전, 한 교수는 퓰리처상까지 받게 되는 명저를 세상에 내놓았다. 10년 전쯤, 웬 중년은 ‘×폼’ 잡으며 그 책을 읽곤 시원하게 까먹었다. 올해, 어느 멋진 젊은이는 계산대에 앉아 근사한 지식으로 머리를 채우고 있다. 서로를 몰라도 우리는 이어져 있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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