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비록 둘이지만 우리는 아직도 ‘우리’로 잔존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의식이 지워져 나가는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마지막 안간힘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따금 여자 혼자서 술을 마시는 소리, 그리고 공허롭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아주 먼 데서 오는 여음처럼 희미하게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그가 보고 싶어요. 누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줄 수 없나요? 내가 그를 기다린다고…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서 아직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박상우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중에서 박상우 씨의 소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1990년 11월 발표됐다. 발트3국 등 독립을 요구하던 연방공화국들에 대해 고르바초프가 15개 구성공화국 국호 모두에서 ‘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삭제한다는 타협안을 내놓은 달이었다. 소련 붕괴의 시작이었다.
술자리에 모인 6명은 ‘우리’로 묶인 이들이다. 겉으로 단단한 듯 보이지만 실은 몇 달 전부터 균열의 기미가 있었다. 정치에 대해 ‘이제는’이라는 회의론, ‘그래도’라는 명분론으로 ‘우리’가 나뉘면서다. 폭설을 계기삼아 수개월 만에 만났지만 자리를 옮길 때마다 ‘우리’ 는 수가 줄어든다. 흩어져가는 ‘우리’의 모습은 1980년대를 상징하는 ‘연대’가 소련 해체와 함께 마감되고 1990년대로 나아가는 역사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연히 만난 여성 화가에게 이끌려 작업실 ‘샤갈의 마을’로 옮겼을 때 남겨진 ‘우리’는 둘이다. 작가는 남겨진 ‘우리 둘’이 손을 맞잡는 장면으로 소설을 매듭지으면서 인간의 온기를 전한다. 작가는 이 소설로 90년대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김춘수 시인이 1969년 발표한 시 제목이기도 하다. 시와 소설로 잘 알려진 구절에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혹은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고 이름 지은 카페가 한때 분주히 들어서기도 했다. 마르크 샤갈이 ‘눈 내리는 마을’ 혹은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작품을 남겼을 것으로 자연스레 여겨지지만, 샤갈이 그린 그림은 ‘나와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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